분배적 협상의 대표적인 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협상 중에 맺어진 베르사유조약이다. 1918년 프랑스, 미국 등으로 구성된 승전국 대표들이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만났다. 독일이 주축이 된 패전국들로부터 자신들이 어떤 보상을 받아낼 것인지 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요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독일군의 대포, 비행기, 함선 등을 양도할 것, 군인의 수를 육해군 합쳐 10만 명으로 제한할 것 등 군사적 제재는 물론 영토 반환, 식민지 양도 등 정치적 압박도 이뤄졌다. 경제적 압박도 엄청났다. 거액의 현금 보상은 물론, 모든 특허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야 했다. 자국 내 천연자원의 채광권도 승전국 차지였다. 말 그대로 ‘뿌리를 뽑는’ 조치가 이뤄졌다. 승전국 대표들은 함박웃음을 짓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완벽하게’ 이겼다. 결과는 어땠을까? 승전국의 압박으로 독일 경제는 파탄 났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실직자가 속출했다. 국가는 혼란에 빠졌다. 그 상황에서 독일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히틀러가 등장했고, 그는 세를 키워 복수를 준비했다. 결국 승전국들은 독일로부터 경제적 보상이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보복을 받아야만 했다. 완벽하게 ‘이긴’ 협상이 또 다른 전쟁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1장. ‘돈’이 아니라 ‘가치’를 충족시켜라」 중에서
1930년, 프린스턴 대학의 플렉스너 원장은 세계 최고의 싱크탱크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세계 곳곳의 유명 학자들을 스카우트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연봉 협상. 원장이 편지를 보냈다. “연봉을 얼마나 드리면 저희 학교로 오시겠습니까?”
당시 독일에서 연구활동을 하던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회신했다. “제가 그보다 더 적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3,000달러를 주십시오.”
편지를 읽고 잠시 고민하던 플렉스너 원장은 이렇게 답장했다. “1만 달러 드리겠습니다.”
협상은 당연히 타결됐고,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대학에 부임했다.
어떤가? 플렉스너 원장이 제안한 연봉은 세상 물정을 몰랐던 아인슈타인이 원한 것보다 3배 이상 많았다. 당시 미국 교수들의 평균 연봉인 7,000달러보다도 훨씬 많았다. 말도 안 되는 협상이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이것이 진짜 성공한 협상이다. 왜일까? 플렉스너 원장은 1만 달러로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마음을 사버렸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에서 기념비적인 연구 성과를 만들어내자 하버드, 예일 등 미국 유수의 명문 대학들이 엄청난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프린스턴을 떠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준 프린스턴에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1장. ‘돈’이 아니라 ‘가치’를 충족시켜라」 중에서
독일의 투자은행 드레스너 뱅크와 세계적인 가구 디자인 업체 이케아 간에 있었던 제휴 협상 사례를 보자. 이 두 회사가 제휴를 맺는다고 발표했을 때, 성공할 거라고 본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두 회사의 조직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 드레스너 뱅크는 권위적이고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투자은행이었다. 반면 이케아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극과 극의 두 기업이 만난 것. 하지만 협상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결과로 타결됐다. 비결은 간단했다. 보수적인 드레스너 뱅크의 협상단은 어울리지도 않는 힙합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협상장에 나타났다. 반면 이케아 협상단은 영화 ‘영웅본색’을 연상시키는 까만 정장을 갖춰 입고 협상장에 등장했다. 상대의 기업문화에 맞추려는 서로의 모습에 양측은 박장대소했고, 협상은 잘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2장. 감정의 방향부터 맞춰라」 중에서
때는 1912년 미국 대선 현장.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후보 선거 사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300만 부나 제작한 홍보 팸플릿의 사진 아래에 “Copyright by ○○”라는 문구가 발견된 것. 손바닥만 한 작은 사진으로 봤을 땐 글자가 보이지 않았는데, 사진을 확대하니 저작권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개인 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참모진의 실수로 무단 사용한 셈. 만약 이 사진을 그대로 사용하려면 저작권법에 따라 최소 300만 달러 이상의 저작권료를 사진사에게 지불해야 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사진사에게 알리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한다면, 자칫 저작권 도용에 따른 도덕성 시비가 터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사진을 찍고 팸플릿을 제작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서 질문. 만약 당신이 선거운동 본부장이라면, 사진사와 어떻게 협상하겠는가?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게 최선일까? 만약 상대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방식이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이번 기회에 한 몫 챙겨야겠다’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300만 달러가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어떻게 됐을까? 선거운동 본부장은 사진사에게 단 1달러도 지불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원금으로 250달러를 챙겼다. 덤으로 사진사에게 ‘미안하다’는 사과까지 받아내면서 말이다. 어떤 ‘마술’을 부렸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방법은 이랬다. 선거운동 본부장은 사진사에게 연락해 대뜸 “축하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루스벨트 대통령 후보의 선거 팸플릿 300만 부에 당신의 이름이 박힌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제 당신은 유명 사진사가 될 겁니다. 우리가 이런 호의를 베풀었으니 당신도 선거 기금으로 1,000달러 정도를 후원하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선거운동 본부장은 사진사의 생각을 ‘사진 저작권료’가 아닌 ‘개인 홍보’라는 틀로 바꿔버렸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4장. ‘틀’에 의도를 관철시켜라」 중에서
인도의 민족 해방 운동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와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 이 두 사람에게는 인종차별로 억압받던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할 부분이 또 하나 있다. 두 사람 모두, 강요하지 않고 상대가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던 협상의 대가라는 점이다. 간디는 인도가 영국 치하에 있던 시절, 민족 해방을 위해 단 한 번도 큰소리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대신 그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인들에게 항상 이렇게 물었다. “당신들은 문명화된 영국인들이고,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고한 인도 국민들을 죽이고 차별하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킹 목사의 접근법도 비슷했다. “미국 헌법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대우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고 경험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사용한 협상법, 눈치챘는가? 간디와 킹 목사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상대가 예전에 했던 말이나 행동이 지금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을 알려주기만 했다. 상대방이 중요하게 여기는 규칙을 파악하고 이를 파고들어 자신의 협상력을 높인 것. 바로 이것이 ‘상대가 만든 기준’을 활용한 협상이다.
---「6장. 논리를 세워야 인식이 바뀐다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