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역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해 1532년 4월 4일 불과 스물셋의 나이로 첫 번째 장편 저술인 『세네카의 관용론 해석』을 자기 돈自費으로 출간했습니다. (…) 눈에 띄는 것은 이 책에서 칼빈이 에라스무스가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을 사용해 원전을 해석했다는 것과, 기욤 부데(Guillaum Bude, 1467-1540)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해설하며 사용한 인문주의적 저술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도 서구 인문학적 글쓰기의 전형으로 내려오는 이 방법은 1) 비교적 긴 문헌학적 설명으로 글을 시작하고, 2) 문법과 논리에 호소하며, 3) 수사학적 표현을 집어넣고, 4) 고대 작가들의 고전적 지식들을 끌어다 활용하는 수법이지요. 칼빈은 그의 첫 번째 저술에서 전형적인 인문주의 글쓰기 방법을 채택한 것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해 썼지만, 세간의 냉대로 결국 큰 상처가 된 이 작품에서 칼빈은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유사성을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중요한 것은 그가 스토아 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인간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섭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확신했다는 점이지요. 이는 칼빈이 회심하기 전부터 이미 세네카를 통해 신의 섭리에 관심을 두었으며, 또한 그의 섭리론이 다른 종교개혁자는 물론 세네카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 줍니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중에서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정리해 선언했듯이 “인간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다가간다”fide homo fit Deus64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고요? 일찍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Nisicredidero, non intelligam65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건대,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눈얼음 계곡”과 “황폐지대”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1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중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경험하고 그에 응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도를 “하나님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했습니다. (…) 애달프게도 우리의 경험은 그렇지가 못하지요. 그렇다면 왜 그런 걸까요? 예수님이 우릴 속인 것일까요? 이런 우매한 질문에 대한 기독교적 답은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하나님의 절대성과 독립성이 손상되지요.
바로 여기서 풀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인간을 오직 자신의 섭리에 따라서 ‘강제적으로’ 이끈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인격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또 어차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강제하려면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기도를 하라고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격성과 섭리는 ‘기도’와 관련해서 적어도 이 두 가지 문제로 서로 부딪칩니다.
---「2장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중에서
요컨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하나님의 섭리는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관건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사람은 마치 욥이나 하박국, 그리고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빌립보서 4:11-12)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란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기도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도록 하며 자족하게 하지요. (…) 알고 보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섭리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디 극단적인 자기체념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교훈했지요.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내세운다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가라.” 부단한 자기체념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누구든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밀이 부서져 빻아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빵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구에 자신을 집어넣어 부서지고 빻아져서?그러나 버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3장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중에서
하나님의 부재라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우리는 1권 『하나님은 존재하는가』의 2부인 “하나님은 존재다”에서 이미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던가? 그 후 지금까지 하나님은 ‘존재 자체’ipsum esse로서 모든 존재물들이 그로부터 나와 그 안에서 존재하다가 그에게로 돌아가는 존재의 장field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해 오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로마서 11:36)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고 있으며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大海”와도 같다고 묘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유도 은혜롭게 되새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생뚱맞게 하나님의 부재 문제를 다루
겠다니?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를 존재ehyeh asherehyeh, YHWH라고 선포(출애굽기 3:14-15)한 교설 안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조리이고 어불성설이지요.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이야기의 전제입니다. 그래서 애초 처음에 다루었던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그것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일수록 고난 앞에서 마주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의문이 우리가 ‘욥의 문제’라고 부르고자 하는 문제,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장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중에서
윤리는 보편적인 것이고 믿음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당연히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에, 즉 믿음이 윤리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이성적 판단입니다. 이런 이성적·윤리적 판단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고, 아가멤논, 옙다, 브루투스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목숨을 바쳤던 거지요. 그러나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보다, 다시 말해 믿음이 윤리보다 높이 있다는 것이 ‘믿음의 역설’paradox of faith이라고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 역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것을 위해 보편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단 정지시키고?다시 말해 일체의 이성적·윤리적 사고와 판단 그리고 발언을 멈추고?그것을 껴안은 채 그것을 뛰어넘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가 필요하다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생각입니다. 매우 특별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아주 위험한 사유이지요. 그만큼 위대한 사유이기도 합니다.
---「3장 하나님의 인격성과 하나님의 부재」중에서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0-1965.12의 고문peritus으로 활약했던 칼 라너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이어 주장했듯이, 신이 자연과 인간을 자신의 자동기계로 창조하지 않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는 원리들에 맡겨 미결정적으로 창조한 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입니다. 즉, 자연과 인간에게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답변을 듣고 당신은 더 강하게 항변하고 싶을 것입니다. “뭐라고? 지진, 해일, 홍수, 가뭄, 기근 등 자연 재해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한 해에 얼마인가?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병으로 고통받다가 죽어 가지 않는가? 전쟁과 테러 그리고 강간, 폭행, 살인과 같은 인간 악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인가? 그런데도 악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흥미로운 답변이 있습니다. 힉이 그의 『종교철학개론』에서 전개한 ‘반사실적 가정법’counterfactual subjunctive에 의한 주장이지요. 힉은 지금의 사실적 세계와는 반대로 모든 자연 악과 인간 악의 가능성이 제거된 다음과 같은 낙원을 가정하고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3장 하나님의 인격성과 하나님의 부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