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 제일’ 정신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것은 중국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과거에 ‘세계 제일’의 국력, 인구, 문명을 과시하며 광대한 국토와 풍부한 자원을 지녔던 중국이 유럽보다 뒤처졌던 사실과 구미 및 일본 등에 국토가 할양되어 유린되었다고 하는 굴욕감 등 이러한 역사에 대한 기억과 역사가 만들어낸 긍지가 중국인으로 하여금 ‘세계 제일’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 p.17~18, 「제1장 중국의 ‘세계 제일’ 트라우마와 덩샤오핑 외교의 성립」 중에서
국민의 신임을 다시 찾고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 경제 발전이며, 그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그것이 덩샤오핑 등의 결론이었다. 거기에서 경제 발전을 가장 중요한 기둥으로 삼는 덩샤오핑 이론(鄧小平理論)이 형성되는 것이다. 경제 정책뿐만 아니다. 외교 정책도 군사안보 정책도 ‘경제 발전’을 핵심으로 재구성되었다.
--- p.25, 「제1장 중국의 ‘세계 제일’ 트라우마와 덩샤오핑 외교의 성립」 중에서
필자는 중국이 2008년 ‘리먼 쇼크’ 이후에 자기주장을 강화하고 대외 강경 자세로 전환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전의 언급도 없이 변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돌연 변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때까지 다양한 사건이 축적되고 시기가 무르익어 무언가를 계기로 표면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 계기가 ‘리먼 쇼크’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 p.39, 「제2장 부상한 중국」 중에서
현재 많은 사람이 2008년 리먼 쇼크 이후 중국의 대외 자세가 변화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리먼 쇼크가 일어난 직후 중국 지도부는 그와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세계 불황이 일어나, 중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히려 국내의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2008년 중국의 무역 의존도(GDP에서 차지하는 무역 총액의 비율)가 57%였던 점을 고려해 보면, 중국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8년 11월 중국 정부는 상정을 훨씬 뛰어넘는 4조 위안(57조 엔)이라는 대규모의 긴급 경제 대책을 민첩하게 제기했다. 단순히 공공사업에 돈을 투입했던 것만은 아니다. 이주 노동자, 즉 ‘농민공(農民工)’에 대한 정중한 지원 대책에서 시작해, 수출 대체의 국내 수요의 환기까지 고려되는 대책을 모두 신속하게 제시했다. 경제 발전의 속도가 둔화되고, 실업자가 급증하여 사회 불안이 초래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국내 상황이 불안정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 당국이 지닌 이러한 신속함, 그리고 정책을 만들어내 실시하는 힘은 역시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이때의 과잉 투자가 그 이후 중국 경제의 구조를 왜곡되도록 만드는데, 어쨌든 한동안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 p.51~52, 「제2장 부상한 중국」 중에서
최근 중국에 관한 미국의 논조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논리의 전개인데, 당시에는 이러한 견해가 국제사회의 주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중국 국내에서 중국의 부상은 ‘평화적 부상’이며, 부상하는 국가는 반드시 기존의 패권국과 충돌하게 된다는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질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의견이 목소리 높게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중국공산당의 명확한 기본 방침이기도 했다.
--- p.63, 「제3장 ‘대국 외교’를 추구하며」 중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출신의 류밍푸는 그 책에서 ‘세계 제일의 부강한 국가’가 되는 것이 근대 중화민족의 꿈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미국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을 필설로 담고 있다. 그리고 자기 억제를 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중국은 그 역사와 문화로부터 자동적으로 덕을 중시하는 ‘왕도(王道)’의 국가가 되며, 중국이 국력으로 세계 제일이 되고, 세계의 리더가 됨으로써 구미의 ‘패권’이 제거되고 ‘무패권(無覇權)’의 세계로 바뀌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 p.83, 「제3장 ‘대국 외교’를 추구하며」 중에서
이처럼 중국이 ‘부강한 대국’의 꿈을 결국 실현하기 시작한 것으로 느끼게 된 그때에 자신들의 주권과 해양 권익이 크게 침해되고 있다고 느꼈던 장소가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였다. 이러한 국내의 분위기 속에서 중국, 특히 인민해방군은 확대되는 임무를 배경으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강화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할 타이밍을 계속해서 지켜보며 가늠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91~92, 「제4장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도모하고 있는가?」 중에서
그런데 중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북방 영토 문제에서의 러시아, 독도 문제에서의 한국도 중국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암묵적 양해’라는 테두리가 씌어져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동중국해에서는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테두리가 벗겨지기 시작하자, 중국은 물리적으로 일본의 실효 지배에 대항하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남중국해에서는 실로 그러한 움직임을 보였다. 일본 국내에서도 정부의 신중한 자세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일본의 실효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이 상승효과로 인해 ‘암묵적 양해’라는 테두리가 서서히 벗겨지게 되었다.
--- p.106, 「제4장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도모하고 있는가?」 중에서
2012년 9월 일본 정부는 센카쿠열도를 민간인으로부터 구입해 일본 민법상의 소유권을 국가로 옮기는 각의 결정(閣議決定)을 했다. 이것이 이른바 센카쿠 ‘국유화’ 문제라고 일컬어지는 핵심 내용이다. 일본에서의 호칭 방식 그대로 한자로 중국에 전달되어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국유화’라고 하는 말에 놀라, 일본이 무언가 본질적인 변화를 초래하고자 하는 중대한 행동에 나섰다고 받아들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때까지 그 누구의 것인지 결정되지 않았던 것을 일본이 약탈·탈취했는데, 게다가 그 섬은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빼앗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중국의 국민감정이 강한 자극을 받았다.
--- p.116~117, 「제5장 중국 외교의 실패」 중에서
여기에 중국 외교의 근본적인 모순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식’의 이념을 내세우며 평화와 발전을 추구하고 필사적으로 중화문명의 후계자로서의 긍지를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과, ‘핵심적 이익’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그러한 격식을 버리고 안색을 바꾸며 어쨌든 자신의 입장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 p.131, 「제5장 중국 외교의 실패」 중에서
바둑이든 장기든 고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판세를 읽어내고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한 수를 둔다고 들었다. 외교도 비슷한 것이다. 물론 어떤 일이 발생해 그 대응에 휘둘리는 일도 흔히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펼치는 외교는 ‘앞의 앞’까지 읽어내야 한다. 중국은 과연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이러한 수를 냈던 것일까? 한편으로 필자가 그러한 앞까지 읽어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p.143, 「제6장 중국 외교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중에서
중국 외교의 현장은 지도자가 제창한 이념과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것 간의 격차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필리핀의 사례를 들어 논하자면, 현장의 중국인은 남중국해는 애당초 ‘중국의 바다’였다고 생각하며 괘씸하게도 그 장소에서 필리핀이 자주 ‘침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드(THAAD, 종말 고고도 방어)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 대한 대응에서도 중국의 신성한 안보가 위협받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이 이를 수정해야 하며, 말을 듣지 않는다면 팔목을 비틀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과 사고방식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세다.
--- p.153, 「제6장 중국 외교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중에서
시진핑이 후계자로 등장한 2012년, 중국의 실태는 실로 어려운 국면에 있었다. 기적의 경제 성장은 중국의 모든 면에 왜곡을 발생시켜,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않을 경우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도 사회의 불만을 흡수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중국의 상황에 대한 불만의 일부는 이제까지의 정책, 즉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부정으로 경도되고, 하필이면 경제·사회에 대한 심도 있는 개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그것에 더해 국민과 사회의 대국 의식만은 커지게 되어, 민족주의가 흘러 넘쳐나고 있다. 개혁반대파와 과격한 민족주의 성향의 ‘좌’ 사이의 야합은 대외적으로 강경한 자세의 주장으로 연결되었다.
--- p.184, 「제7장 중국 외교의 재생을 위한 길」 중에서
이러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고려해 보면, 중국의 시대가 그리 간단하게 올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중국은 인구에서는 타국을 압도하고 있다. 경제도 과학기술도 착실하게 따라오고 있으며, 추월한 분야도 있다. 하지만 아직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힘은 약하다. 언젠가 이러한 힘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미국을 제치는 날이 오게 될까? 이것에는 커다란 의문부호가 붙는다. 세계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즉 이주해 거기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국가, 자신들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국가, 과연 중국이 그러한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이러한 국가와 사회로서의 매력이 소프트 파워의 근원에 있다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90~191, 「제7장 중국 외교의 재생을 위한 길」 중에서
다음으로 시진핑은 “공정하며 합리적인 국제 질서의 확립은 인류가 줄곧 추구해 온 목표였다”라고 논하고 ‘주권의 평등’을 말했다. 그리고 “국가의 대소, 강약, 빈부에 관계없이 주권과 존엄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고, 내정 간섭은 용납되지 않으며 그 누구라도 자주적으로 사회제도와 발전의 길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다”라고 논했다. 그런데 바로 덩샤오핑이 말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각국이 정책 결정에 평등하게 참여하는 것”, “각국의 권리와 평등, 기회 균등, 규칙의 평등”한 추진을 요구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올바르다. 즉 유엔 헌장으로 대표되는 정치에서의 자유민주주의를 시인했던 것이다.
--- p.202~203, 「제8장 시진핑의 신외교와 북한」 중에서
애당초 중국에는 두 가지의 사고방식이 있었다. 중국의 안보 전문가는 일관되게 북한의 핵 보유가 중국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전쟁을 통해 생겨난 중국과 북한의 ‘피로 맺어진 유대’라는 신화도 뿌리 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북한이 붕괴하면 미국의 영향력이 중국의 국경까지 직접 미치게 되고, 또한 불안정해진 북한에서 대량의 난민이 몰려들어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그리고 북한 정책은 대일 정책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국내 정치가 밀접하게 결부되는 민감한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비핵화’와 나란히 ‘평화’와 ‘안정’이 강조되고 그러한 것을 ‘동시에’ 달성하는 외교 정책이 제기되었다.
--- p.225, 「제8장 시진핑의 신외교와 북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