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해야 하지?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한 채 몸만 빼려고 발버둥 쳤어. 등 뒤의 사람은 내 팔을 꽉 쥐어 눌렀어. 소용없다는 말을 손으로 전하는 듯했어. 눈앞에 보이는 모습도, 나를 옥죄는 이 상황도, 다 없는 일로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과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눈과 마음을 다 가린 채 있어야 했지.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조차 없어. --- pp.69~70
“예를 들자면 이런 거지. 동네 후미진 빈터에 사람들이 휴지나 캔 이딴 걸 몰래 버리다가 거기에 꽃을 심어 놓으면 안 버린대. ‘아! 누가 관리하는 데구나.’ 하면서 빈터를 존중하는 거지. 그니까 한마디로 갑자기 네가 달라 보이는 거야. 남친이, 그것도 잘생긴 애가 와서 설레발치니까. 솔직히 우리 반에 네 이름이 나연인 줄을 오늘 처음 알았다는 애도 있어. 알아?”
짝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동네 후미진 곳의 빈터가 그려졌어. 스산한 바람이 쓸고 지나가는 길모퉁이의 후미진 곳. --- p.78
그동안 엄마 아빠가 숱하게 다퉜어도 오늘처럼 병원에 실려 간 적은 처음이었어. 아빠는 늘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했지만 폭력은 폭력이야. 내게 가해지는 폭력이 아니라 해도, 보고만 있어도 아프고 듣기만 해도 아픈 폭력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다치면 더 아프고 아파서 가슴속에 파편이 박히는 무엇일 뿐이지. 폭력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는 없어. --- pp.110~111
먼저 말을 거는 아이도 없고 내가 지나가면 어깨에 살짝 손을 얹어 친근감을 나타내던 애들도 전혀 없었어. 오히려 길을 막아서는 아이까지 생겼어. 어디 한번 지나가 보시지, 하는 표정으로. 나는 또다시 투명 인간이 된 건가? 교실 뒤 거울을 보면서 나의 실재를 확인했을 정도라니까. 진짜 그렇게라도 해 봐야 할 만큼 아이들은 나를 완벽한 투명 인간으로 대했어. --- p.120
사실, 문 앞에 서 있을 때 루 오빠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감쌌거든.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돋으면서 머리카락이 삐죽 서는 거야. 그건 분명 낯익은 느낌이었어. 익숙한 향기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무거운 추가 달린 확실한 느낌이 자꾸만 나를 잡아당겼어. 아니, 아닐 거야, 부인해 보지만 본능이 이끄는 분명한 확신. 루 오빠 스킨 냄새가 그날 밤 어둠 속의 그 사람을 떠올리게 했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한 사람이 루 오빠일 리 없다고, 아니,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를 계속 털어 내야 했어. --- pp.134~135
아빠가 미웠어. 깊은 밤 도둑질을 하느라 안채 정원을 달리던 아빠가 정말 미웠어. 그딴 사람이 내 아빠라니.
루 오빠도 미웠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은 오빠가 원망스러웠어. 나한테 동병상련이라고 말했으면서……. 편하게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그런 미더운 사촌 오빠로 남지 못한 루 오빠가 미웠어. 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야 하는지, 왜 하필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지, 오빠를 그렇게 만든 게 뭔지 정말 야속했어. --- p.146
발작하듯 화내는 엄마에게 쫓겨나 집 밖으로 도망치는 날이면, 루 오빠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다시는 내가 먼저 연락하지 말아야지, 다부지게 결심하고 다이어리에 각오까지 적어 놓고 마음을 다잡다가도…… 마음이 불안해지고 힘들어지면 결국 루 오빠에게 의지했어. 그러다 오빠가 그 일을 또 부탁하면 거절을 못 하고……
오빠는 내 아킬레스건을 잡고 숨통을 조여 왔어. 그래서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 p.159
여자 화장실에 줄 서 있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나연이니?” 하더라고. 중학교 때 반 친구 따라 성당 여름 캠프에 따라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이었어. 캠프에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색깔로 자기 이름을 정해서 소개하라기에 나는 색이 없다 끝까지 버텼더니 그 선생님이 내게 무지개색이라고 이름을 붙여 줬던 기억이 있어. 그때 선생님은 자기를 맑은 주홍색이라 소개해서 다들 주홍 샘이라고 불렀지. --- p.166
‘침묵은 너를 보호하지 못할 거야.’
꿈속의 깊은 바다, 그 깊은 침묵이 내게는 아늑하기만 했는데, 그게 해로운 거라고 주홍 샘은 말하고 있었어. 묵직한 죄의식 같은 게 꽉 조인 안전벨트처럼 나를 누르더라. 대체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게 뭘까? 침묵하지 않으면 과연 엄마 아빠가 나를 보호해 줄까? 무섭게 변질되어 버릴 사실을, 내가 끝까지 잘 지켜 갈 수 있을까?
---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