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지리산에 오르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나는 전과 다른 나를 찾아서, 나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들여다보고자 지리산에 들어선다. 거친 숨과 땀 끝에 몸무게가 가벼워지고, 티끌을 털어 내 마음의 무게도 달라지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지리산은 들어서면 누구나 ‘지혜(智)가 달라지는(異)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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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빛에 물들어, 만복대를 비롯한 서북능선과 토끼봉을 위시한 종주능선이 마치 이불을 걷어 내듯 붉은 몸체를 드러낸다. 황소의 울뚝불뚝한 등허리가 기지개를 펴는 듯하다. 남 섬진강과 구례 벌판은 구름에 잠겨 왕시루봉 능선만 우뚝하고, 멀리 무등산과 월출산 봉우리가 아득하다. 360도를 뺑 둘러 장관 아닌 곳이 없다.
--- p.17~18
이제 ‘구름 위 꽃밭’이라 불리는 노고단은 자연복원의 성지가 되었다. 자연의 복원력과 사람의 정성이 빚어 낸 재창조물이다. 언젠가는 송신탑 시설도 철거해 온전한 옛 노고단으로 되돌려야 한다. 이런 과거와 미래를 모르는 사람들이 탐방로를 벗어나 ‘가냘픈 식물들을 밟고’ 카메라 포즈를 취하는 것을 타이르면, 이 큰 산에서 자기 발자국 하나가 무슨 대수냐는 표정이 대부분이다. 그 사람들 큰 몸뚱이에서 아주 작은 점에 주사기를 찔러 주고 싶다.
--- p.19
어떤 현자가 산행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고 했고, 지리산 이름 뜻이 이 산에 들면 지혜가 달라진다 했으니, 지리산이라는 큰 도서관에서 1박 2일 책을 읽고 내려서는 듯 마음은 뿌듯하고 몸은 가볍다. 마음이 다시 답답해지거나 몸이 무거워지면 지리산도서관을 다시 찾을 것이다.
--- p.55
이끼폭포 아래 이끼는 여기서 ‘증명사진’을 찍는 사람들 때문에 다 벗겨졌다. 수백 년 자란 이끼들인데. 이곳을 불법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은 ‘대담해서’ 곳곳에 새로운 길을 만들고, 희귀식물을 채취하고, 취사와 야영을 하면서 지리산을 망가뜨린다.
--- p.82
하룻밤 묵고 이튿날 바라본 지리산은 온통 수묵화이다. 어저께 내린 차가운 가을비가 덕산벌판의 온기에 가벼워져, 지리산의 높고 낮은 수십 개 능선이 겹쳐진 사이사이로, 솜뭉치 이불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산 밑 여름과 산꼭대기 깊은 가을이 흰 구름과 뒤섞이며 변화무쌍한, 어제와 다른 오늘의 지리산이다. 내일은 또 다른 지리산일 것이다.
--- p.100
이 길을 내고자 군에서는 큰 예산을 지원했고, 절에서는 귀중한 땅을 내놓았으며, 국립공원에서는 자연을 배려한 세심한 공법으로 길을 닦았다. 이 길은 최대한 자연을 보호하면서도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마음껏 즐기고 배울 수 있으며, 동시에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고자 만든 길이다. 부디 이 삼박자가 오래도록 균형을 맞추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 p.117
지리산에 사는 생물은 총 1만 653종으로, 이는 남북한 생물종을 합친 5만 4,428종의 약 20%에 해당한다. 한반도 면적의 0.2%에 불과한 지리산에 이만큼 다양한 생물이 사니 지리산은 생태계의 보물창고라고 할 만하다.
--- p.157
지리산을 벗어나 섬진강 남으로, 백두대간 북으로 내달리는 곰이 한반도 생태계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의 최종 목표이다. 민족 신화에 우리 조상으로 나오는 곰을 복원하고, 함께 산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렇게 할 만한 국력도 되고, 국격도 그런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다.
--- p.167
지리산이 모든 사람과 사상을 아우른 포용의 산인 것처럼, 최치원은 우리 전통 사상과 유교·불교·도교를 융합해 실현하려 했던 포용의 인물이었다.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주는 이상향의 산 지리산에서 이상향 청학동을 만든 것도 바로 최치원이다.
--- p.197
지리산은 대한민국 육지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도 가까이서 바라보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서 구례에서 노고단을 보면 펑퍼짐하게 누워 있는 듯하고, 동 산청이나 북 함양에서 천왕봉을 우러르면 앉아 있는 듯하고, 어디서도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특히 천왕봉 턱 밑의 덕산마을에서 바라보는 천왕봉과 중봉은 스카이라인이 뭉툭하다. 그 스카이라인에서 양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덕산을 껴안은 모습은 마치 어머니가 두 팔 벌려 안아 주는 듯하니 덕산은 천생 지리산 마을이다.
--- p.199
지리산 중산리, 의신마을, 뱀사골에 빨치산과 토벌대에 대한 홍보관이 있다. 그러나 이 슬픈 역사에 대한 사실과 진실이 충분히 담겨 있지는 않은 듯하다. 과거의 아픔을 헤집는 게 아니라 희생자와 생존자의 한을 풀어 주고, 아직까지 갈등 관계에 있는 희생자 후손들의 화해를 위해서라도 더 많은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화해의 산, 포용의 산이라 일컫는 지리산에서는 더욱.
--- p.208
자연을 개발해서 먹고살자고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아름다운 자연과 깨끗한 환경이 지역경제를 이끄는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사회와 국립공원이 ‘어울렁 더울렁’ 함께 발전하면서 살아가는 동반자가 되었으면 한다.
--- p.250
국민과 함께 만든 지리산의 미래상은 ‘대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생명의 산, 국민의 산’이다. 생태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면서, 그 생명력이 백두대간으로 뻗어 나가 한반도 전체 자연을 지탱하는 생명의 산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의 유구한 문화와 민족정신을 지키면서 국민과 지역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주는 국민의 산이 되어야 한다.
--- p.264~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