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董痴). 골동에 미친 바보라는 뜻이라는데 누가 지었는지 별호 한 번 잘 지었다. 두들 동치, 동치 해대니 김윤묵이라는 제 이름은 개가 물어갔는지 없다. 동치가 한성 계동 반이 지니고 있던 풍죽(風竹)을 얻어내기 위해 다섯 번이나 그 집을 찾아갔다는 이야기는 명하다. 동치는 풍죽을 손에 넣고 계동 양반한테 천 냥을 주었지만 그 양반은 거절했다고 한다. 계동 양반 또한 여느 양반들처럼 대대손손 전해지는 보물을 돈과 바꾸는 것을 가문의 치라 여겼단다. 참 희한한 양반들 아닌가! 나 같으면 그깟 풍죽 한 점 갖겠다고 그 먼 길을 서지도 않을 테고, 또 풍죽 한 점에 천 냥을 준다면 냉큼 받겠다.
“이보게 병신, 풍죽 한 점만 그려 주게.”
병신(丙申)은 내 이름이다.
--- 「병신유고」 중에서
-언제 좋은 시절이 다시 온다면 〈죽림한풍〉을 동치한테 꼭 줄 것이다. 어차피 〈죽림한풍〉은 동치 것이다. 종하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잠시 보관했다가 때가 되면 그 집에 돌려줄 것이다. 동치 식구가 한성으로 가든 평양으로 가든 나는 동치를 다시 만날 이다. 팔도가 좁다 하고 휘젓고 다닌 내가 아니던가!
종하는 『병신유고』 마지막 부분을 읽고 덮었다.
--- 「후손들」 중에서
-종하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죽림한풍〉을 찾기 위해 골동계에 발을 들였고, 〈죽림한풍〉을 찾으면 골동계를 떠나겠노라고 말했다. 아내는 대체 〈죽림한풍〉이 어떤 그림이기에 그렇게 악착같이 찾으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바람을 실감나게 그린 것. 풍죽이라는 이름 그대로 그림에서 진짜 바람이 분다는 것. 바람을 빼놓고 〈죽림한풍〉을 설명할 수 없었다. 종하가 돈을 모으는 이유도 〈죽림한풍〉을 찾기 위해서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죽림한풍〉을 사게 될지 모른다. 〈죽림한풍〉이 나타났는데 돈이 없어서 손에 넣지 못하는 불상사
는 없어야 했다. 무조건 돈부터 마련해놓고 봐야 했지만 돈은 좀체 모이지 않았다.
--- 「죽림한풍」 중에서
-종하는 후지노가 〈죽림한풍〉을 펼치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엎드렸다.
“김 상, 바로 앉아.”
후지노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엎드린 종하 앞으로 다가왔다. 열흘 만에 보는 〈죽림한풍〉이다. 그토록 찾던 〈죽림한풍〉이 후지노 손에 있었다. ‘丙申’이라 쓰인 글을 보자 동글납작한
병신 얼굴 모양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이 풍죽을 보인 사람은 몇 안 돼. 자랑하면 닳을까 싶어 누구한테도 자랑하지 않았어.”
〈죽림한풍〉을 제 앞으로 끌어가는 후지노 손은 떨렸다.
--- 「후지노」 중에서
-“이 도둑놈 새끼!”
그날은 폭우에 천둥 번개까지 쳤다. 강석초가 삽을 들고 무덤 주변을 서성이는 데 서늘한 총구가 닿았다. 순사들이 순식간에 그를 둘러쌌다. 강석초가 비오는 깊은 밤에 고분에 손을
대는 것을 아는 사람은 요시이뿐이었다. 요시이 제안을 거절한 게 후회됐지만 때는 늦었다. 강석초는 1년가량 복역을 마치고 나왔다. 마을에 들어서자 장정들이 그를 덮쳤다.
“근본도 뿌리도 없는 천하 호로자식 같으니! 어디서 굴러 처먹다 우리 마을에 흘러들어 와 무덤을 파먹느냐 말이야, 에이 굴총한 놈! 너 같은 천하 상것은 생매장 당해야 해!”
장정들이 매질과 발길질을 하자 사람들은 점점 더 모였다.
굴총할 놈! 그 말은 포승줄에 손이 묶인 채 순사한테 붙잡혀 가는 도굴꾼들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뱉는 말이었다. 굴총할 놈이라는 말은 조상과 선조, 부모 자식도
모르고, 위아래도 모르며 막무가내로 날뛰는 상것이라는 욕굴총한 놈이었다
--- 「굴총한 놈」 중에서
-종하는 심창수가 기미년 삼일운동에 가담했을 때 용인당 96 구석 자리에 앉아 손님이 팔고 간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람들 만세소리가 가게 안까지 울려 퍼졌지만 종하는 바깥을 내다보지 않았다. 거리는 순사 반,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 반이라며 바깥을 휘돌고 온 최달구가 들려주었다. 종하는 심창수 신변에 문제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용인당 구석에 앉아 청동화로나 쟁반을 닦으면서 이따금 뒷문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종하는 바깥에 동요되지 않으려고 물건 손질에 골몰했다.
--- 「저울」 중에서
-“얼마 전에 조선에서는 삼일운동이다 뭐다 해서 난동이 일었소. 우리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것은 안 됐지만 약육강식은 자연의 섭리 아니오?”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동물의 섭리요.”
강석초는 마츠하라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의 눈은 옴팡눈이었다.
“내가 만난 조선인들은 모두가 똑똑하고 애국심으로 이글거리던데 어째서 나라를 잃었는지 미스테리 중에 미스테리란 말이오. 뭐 그런 이야기는 이런 데서 할 건 아닌 것 같소.
나라는 나랏님한테 맡기고. 내 소개가 늦었소, 여기.”
강석초는 마츠하라가 내민 명함을 받았다. 그는 변호사 사무장이었다.
--- 「마츠하라」 중에서
-“이번 경매는 닛타 소장품 일괄 처분이라는데요.”
“과연 일괄일까요? 알짜배기는 일본으로 빼돌려놓지 않았을까요?”
“닛타 소장품은 거의 일품들이니 응찰자가 많을 거요.”
“그 사람도 일본에서 겨우 밥이나 먹고 살았다던데 조선으로 건너 와 얼음공장에다 농장까지 운영하면서 벼락부자가 된 거지요.”
--- 「품평회」 중에서
-종하는 가방에서 꺼낸 그림을 방바닥에 펼쳤다. 그가 오래전에 그렸던 〈죽림한풍〉 모사화다. 〈죽림한풍〉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초조감이 몰려올 무렵 기억을 더듬어 모사화
를 그렸다.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죽림한풍〉을 그려놓고 싶었다. 그러나 〈죽림한풍〉 모사화는 병신이 그린 원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병신의 〈죽림한풍〉에 는 바람이 넘실거렸
지만 종하 모사화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 「이삭줍기」 중에서
-“이제 당신이 아끼던 군접도마저 없앴네요.”종하가 상자에서 청자진사죽문병을 꺼내자 아내가 말했다.
“그런데 죽림한풍은 언제 찾아 와요?”
“오늘내일.”
“오늘내일? 당신은 꼭 죽림한풍하고 숨바꼭질하는 것 같네요. 도대체 죽림한풍이 있기는 있는 거예요?”
“곧 찾는다잖소.”
“죽림한풍을 찾는데 뭐가 그리 복잡해요? 병신 유고를 팔아 없애고, 군접도를 없애고 또….”
“곧 찾는다니까?”
종하는 저도 모르게 음성을 높였다.
“죽림한풍은 안 봐도 실컷 본 것 같아요. 그림을 모르는 내가 봐도 군접도는 정말 좋았는데.”
“죽림한풍을 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올 거요.”
종하는 청자진사죽문병을 빙 돌려보았다. 밑바닥과 입구를 손으로 매만졌다.
“당신이 군접도를 집에 들고 온 날 기억 안 나요? 죽림한풍이고 뭐고 이제 다시는 병신 그림 안 찾는다, 그 말한 거 기억 안 나느냐고요?
--- 「군접도」 중에서
-“이게 가짜라는 것을 마츠하라 씨는 언제부터 알았소?”
종하는 목이 옥죄어 오는 것 같아 셔츠 섶을 만졌다가 놓았다. 목이 말랐다.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그게 뭐가 중요하오, 가짜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예전에 마츠하라 씨도 이 물건을 탐냈잖소? 이게 탐나서 요시이와 끝까지 경합을 벌였잖소.”
“나는 막판에 포기했소. 그때도 이 물건이 찝찝했는데 결국….”
“그러니까 마츠하라 씨는 이 청자진사죽문병 가격만 올려놓은 바람잡이였군요.”
“말조심 하시오, 바람잡이라니!”
언젠가 최달구가 그랬다. 마츠하라를 조심 하라고. 그는 뱀처럼 교활한 모사꾼이라고.
--- 「새옹지마」 중에서
-“움직이지 마.”
강석초는 총을 겨눈 자세 그대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래서 조센징은 거둬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나왔군. 자네를 일본 골동품 소장자들과 교류하게 해준 사람이 누구였나?
일본에서 청자를 살 수 있게 도운 사람이 누구였나?”
“말은 똑바로 하지. 그 사람들은 골동품 소장자들이 아니라 자네 같은 바람잡이나 모사꾼들 아니었나? 자네가 나서서 물
고 온 청자 표주박 모양 주전자, 그거야 말로 가짜였어. 청자감식가네 뭐네 하면서 오지랖 떨던 자네를 믿었던 내 잘못이었지. 가짜를 진짜라 하고 진짜를 가짜라 하면서 골동 소장자들을 우려 뒷돈을 챙기는 자네 같은 놈이야말로 양아치지. 그런 더러운 짓거리는 일본에서 끝냈어야지, 조선에 와서도 그 버릇을 못 고쳤더군.”
“이 새끼가!”
마츠하라가 재빨리 돌아서서 강석초 총을 빼앗으려 했다.
“탕!”
강석초는 얼른 공포탄을 쏘고 마츠하라 심장 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 「새 소장자」 중에서
-〈죽림한풍〉은 종하 것이다. 〈죽림한풍〉은 처음에는 조부 것이었지만 조부가 종하에게 주었다는 사실까지는 병신이 죽림한풍을 찾아서 모를 터였다. 〈죽림한풍〉은 병신이 잠시 보관했다가 때가 되면 돌려준다고 했으나 병신은 돌려주지 않았고, 종하는 돌려받지 못했다. 병신이 죽은 뒤로 행방불명인 〈죽림한풍〉은 ‘명품상회’ 구석에 있다가 후지노 손에 갔다. 후지노 손에 있다가 마츠하라 손에 넘어갔다. 이제 〈죽림한풍〉은 경성미술구락부 경매로 나왔다.
-“이천 원!”
종하는 힘껏 외쳤다. 강석초가 그를 뚫어져라 보고 ...
--- 「죽림한풍을 찾아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