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서양 연극의 흐름을 세계사의 흐름과 함께 시대별로 조망하고 그 연극의 특징이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발전되고 변화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서양 연극은 그리스 아테네로부터 2,500여 년, 동양의 경우는 인도 연극을 기원으로 2,000여 년이라는 세월을 이어왔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 연극 또한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동양 연극의 전통에서 그 흐름을 찾는 것이 당연한 듯 보인다. 그러나 21세기 우리 앞에 놓인 연극들의 상당수는 이미 서양 연극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20세기 초 한국의 개화기에 서양의 의식주를 비롯한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이래, 그즈음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 연극 역시 지금의 우리에게는 익숙한 연극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양 연극의 기술을 다채롭게 융합하여 새로운 연극적 개성을 창조하려는 시도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근·현대 연극의 역사는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유입된 지 이제 갓 100년을 넘긴 서양 연극의 발자취와 함께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다양한 서양 연극의 사조들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혹은 사라져갔을까?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공연 형식들은 어떻게 나뉘며 현대연극에는 어떠한 유산을 남겼을까? 이 책은 이러한 궁금증으로부터 출발하여 21세기에 진행되고 있는 포스트드라마 연극까지를 주요 범위로 다루고자 한다.(중략)
1960년대 이후, 퍼포먼스를 융합한 행위 중심의 연극들은 기존의 전통적 언어 중심 연극 행위와는 구별되며, 해석학적 의미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연극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연극의 의미 구성이 기호성에서 수행성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장르 간 융합으로 경계 허물기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실증적 사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대학에서 연극 관련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이와 같은 정보가 충분히 전달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더군다나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학생들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연극사는 다기능적 소임을 수행하는 교과목으로서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연극사 공부는 우선 연극 관련 전문인이 될 미래의 후학들에게 연극적 유산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한편, 동시대는 물론이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맞닥뜨리게 될 연극에 관한 상상력과 아이디어의 원천을 제공한다. 연극사는 과거의 주요한 사회적 사건들을 살펴봄으로써, 그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연극을 분석하고 아울러 그 시대의 관습과 규범 등을 고찰해볼 수 있다. 한마디로 과거 사회를 되짚어 현재를 통찰하고 미래를 꿰뚫는 직관을 제공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연극이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며, 연극은 언제나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자리할 것이다.
--- 「책머리에」 중에서
많은 연극사가,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은 각자 저마다의 분야에서 연극의 기원에 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는 인류의 기록이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인류가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BC 3000년 이집트 그림문자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들을 인정한다면, 연극이 선사시대 어디쯤에서 시작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 정도는 꽤 신빙성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연극에 관한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BC 6세기경 고대 그리스 시대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따라서 우리의 연극사 연구는 어쩔 수 없이 기록에 근거한 역사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연극의 기원이 이렇게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 시대 이전에도 현대의 연극과 유사한 형태의 몸짓들이 있었음을 추측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며, 현대 연극에 필요한 대부분의 요소가 이미 기록 이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 p.15-16
포에니 전쟁 이후 그리스 비극과 희극의 영향을 받은 로마는 그중에서도 신희극에 관심을 가졌다. 로마인들은 예술의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실용성을 바탕으로 에트루리아와 그리스의 문화를 자기들의 목적에 맞게 변형하여 토착화시켜 나갔다.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로마 최초의 축제 루디 로마니(Ludi Romani)였는데, 이 축제는 그리스의 제우스 신에 해당하는 로마의 주피터 신께 바치는 의식이었다. 이 축제가 바로 에트루리아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리스 문화와 접촉하기 시작한 BC 250년경부터는 연극을 축제에 포함시키게 된다. 그러다가 AD 250년 이후에는 극장에서 1년에 100일이 넘게 공연이 펼쳐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p.58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서양 연극의 흐름은 다음의 두 가지로 크게 나뉠 수 있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전통을 지속하려는 사실주의적, 환영주의적, 희곡 중심적 연극 전통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연극 텍스트의 충실한 재현을 지칭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근거로 인간에 관한 모방(mimesis)과 도덕적 정화작용, 즉 카타르시스(Katharsis)를 연극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인식은 세상을 연극과 동일시하는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신고전주의 시대와 19세기 사실주의까지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드라마 연극의 충실한 재현에 맞서 ‘연극의 재연극화’를 주장한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연극과 이들의 연극 정신을 계승한 1960년대의 네오아방가르드 연극에 의한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다. 이들은 연극의 본질이 드라마 텍스트의 재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텍스트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 매체로서의 미학적 체계와 연극적 기능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 p.213-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