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이 집어던진 ‘편집국장 홍명희’ 명패가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땅바닥으로 내던져진다. 난장판이 벌어졌는데도 편집국장석 바로 앞자리 즉 학예부장 자리의 주인이 줄곧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학예부장 허영숙이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와병 중인 남편을 대신해 신문사에서 근무해오던 허영숙은 배우자가 이광수라는 후광에다가 그녀 본인이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라는 이력에 힘입어 학예부장에 취임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당혹감과 난처함에 놀란 그녀의 얼굴은 평상시의 빛을 아주 잃어버렸다. --- p.87

여운형이 손기정에게 현진건을 소개했다. “이 분은 아주 유명한 소설가시기도 하고, 또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계시는 빙허 현진건 선생이시다. 인사드려라.” 이어서 그는 현진건에게 “손 선수는 내 아들 홍구와 양정 동기인데 둘이 아주 죽마고우라네. 그런즉 앞으로 많이 밀어주시게” 하였다. 이윽고 손기정이 현진건에게 꾸벅 절을 하고는 “압록강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많이 보셨다고 하셨습니까? 저도 약족 보통학교 다닐 때 아침저녁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아마도 그때 다리에 근육도 생기고 폐활량도 크게 늘었던 것 같습이다, 하하!” 하였다. 현진건이 “그때 내가 본 소년 중에 손 선수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면서 문득 마츠다 후미꼬를 떠올리는 등 회상에 젖어드는데, 손기정이 불쑥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하고 묻는다. --- p.123

손기정이 진흙으로 뒤엉킨 신설동 뻘밭길을 한참 걷다가 숨을 고르려고 잠깜 멈춰 서서 고개를 드니, 저 멀리 현진건 선생이 기거하는 누추한 집 한 채가 아득하게 눈에 들어온다. 미풍도 불지 않지만 달리 움직이는 것도 없는 동대문 뒤쪽 저녁하늘은 점점 어두워져가는 먹구름에 짓눌려 그저 음울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기색이잖아? 큰일이군. 그리 되면 설렁탕과 막걸리를 대접할 수가 없게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기정이 바라보니, 집으로 다가가는 좁은 길 좌우에는 붉은 듯 푸른 듯 보랏빛인 듯 멀리서는 좀처럼 분간되지 않는 등불 여럿이 허공에 몸을 기댄 채 매달려 있다.

2021년은 ‘빈처’ 발표 10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 연도입니다. 하지만 ‘한국 단편소설의 아버지’라는 평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진건을 추모해 진행된 국가 혹은 지방자치단체 주도 기림 행사는 없었습니다. <br/>이를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한 이 책의 저자는 현진건 타계일인 4월 25일 추모 문학제를 시행했고, 8월 13일에는 일장기 말소 의거 세미나도 열었습니다. 그리고 현진건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일장기를 지워라 1, 2’와 현진건 단편들을 2021년 버전으로 재창작한 연작 장편 ‘조선의 얼골 한국의 얼굴 1, 2’, 현진건 평전 겸 소설세계 해설서 ‘현진건 100년의 오해’를 발간했습니다. 3종 5권의 책이 밑거름이 되어 현진건 선생을 제대로 현창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