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1999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30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6223163
ISBN10	8986223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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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p.53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모두 세 사람이다. 겨울철이라 공사판에 일이 없어 일자리를 찾아가는 착암기 기술자인 영달과, 살벌하고 비정한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인 삼포로 내려가는 말수가 적은 목공 정씨, 그리고 군인들을 상대로 위안부 노릇을 하다 도망나온 백화라는 인물이 그들이다.

이들은 변화하는 사회 호나경에 적응하지 못한 하류층의 인물들이지만 소박하고 인정이 많은 인물들이다. 그들이 조건없이 베푸는 뜨거운 인간애는 가진 자의 위선과 허위를 초월하는 요소임을 작품은 강조한다. 특히 백화의 생을 기술하는 대목에서 인간애의 숭고함을 극치로 이끌어 독자를 사로잡는다.

최수들의 옥바라지를 하는 그녀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하룻밤을 보내고 떠나보내기를 여덟 번이나 한다. 떠나 보내는 아침마다 그녀는 차부로 나가 먼지 속에서 버스가 가리울 때까지 서 있곤 한다. 옷 한 가지 못해 입었던 그 때가 그래도 그녀가 보낸 삭막한 3년 중에서 가장 평화로웠고 즐거운 시절이었음을 회상한다.

--- p.221

누룩 같은 만월이 토담벽을 파고들면
붉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칡뿌리를 한 발대
가득 지고 왔다
송기를 벗기는 손톱은 즐겁고
즐거워라 이마에 닿는 할아버지 허리에선
송진이 흐르고
바람처럼 푸르게 내 살 속을 흐른다
저녁 풀무에서 달아오른 별들,
노란 벌이 윙윙거리면
마을 밖 사죽골에 삿갓을 쓰고
숨어사는 어매가
몰매 맞아 죽은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삼베치마로 얼굴을 싼 누나가
송기밥을 이고
봉당으로 내려서면
사립문 밖 새끼줄 밖에서는
끝내 잠들지 못한
맨대가리의 장정들이 컹컹 짖었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쭈그리고 앉은
산길에는 썩은 덕석에 내다버린 아이들과 선지피가 자욱했다
어둠 속에 숨 죽인 갈대덤불을 헤치고
늙은 달이 하나 떠올랐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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