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책을 읽다가 ‘양가감정’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20대 초중반까지 나를 설명하는 단어를 딱 하나 뽑으라면 단연코 이 ‘양가감정’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원망하면서도 사랑했다. 주변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으면 서도 이 관계 또한 쉽게 깨지는 것은 아닐까, 가까이 지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의 감정조차 확실히 인지하기 어려운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서 누구 하나 믿을 사람 없는 사회로 첫발을 내디뎠다.
--- p.18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다는 칭찬이 그렇게 좋았다. 장하다며 쓰다듬는 어른들의 손길도 좋았고, 무엇보다 착한 아이가 된 것 같아서, 동생이 우러러볼 만한 언니가 된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티내지 않고 꾹 참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일단 참고 꿋꿋이 버텼다. 그런 뒤 내게 돌아왔던 칭찬처럼, 뭐든지 꾹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찾아올 거라 믿었다. 첫 인턴 경험 전까지 말이다.
--- p.20
그전까지 나는 이것저것 하긴 했지만, 사실은 취업 준비생이라는, ‘뭐라도 하고 있다.’라는 변명거리를 댈 수 있는 도피처에 숨어 있을 뿐이었다. 자격증을 따러 무거운 가방을 챙기고 집을 나설 때, 승무원 학원 수업을 마치고 차를 타고 귀가할 때 느끼는 옅은 뿌듯함과 막연한 희망에 취한 채 제자리를 맴돌았다.
--- p.35
이후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페미니즘 관련 게시글에 조용히 좋아요만 눌렀다면, 나의 생각을 활발히 공유하기 시작했다. 조신하게 행동해라, 알아서 조심해라 하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생길 만큼 듣고 자랐지만, 그 말은 결국 여성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었다. 조심해도 소용없다. 그저 나는, 우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페미니즘 관련 게시글을 이전보다 더 활발히 공유했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날의 충격은 나에게만 거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온 것이 아닌 듯했다.
--- p.49
사실 나는 페미니즘을 접하고 난 후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행법상 결혼은 이성 간의 결혼만 인정하며,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만이 정상 가족임을 은연중에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혼 가정, 조손 가정, 한 부모 가정, 나아가 동성 커플까지 많은 이들이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으로 프레임 씌워져 사회에서 소외됐다. 가족의 형태를 국가가 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 제도 밖에 있는 이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가족의 권리와 혜택을 완전히 누릴 수 없으며, 심지어는 함께하는 이가 아플 때 법적 보호자가 되어 줄 수 없는 경우조차 생겨났다.
--- p.71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어디 가서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었음에도 도무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를 몰랐다. 사실, 일을 할 때는 그런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보다는 ‘남’이 나를 좋게 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디서도 피해를 주지 않고 1인분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 그게 내겐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업무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일을 처리하려 노력했고, 행여 나에 관한 고민이 고개를 치켜들면 앞선 일에 집중하며 억지로 내리눌렀다. 퇴사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가자, 그런 고민들은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좁은 틈새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 p.121
요즘 우리는 함께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며 서로의 의견을 묻기도 한다. 때로는 거칠게 피드백할 때도 있지만 혼자 대학원에 다닐 때보다 더욱 빠르게 디자인 작업의 퀄리티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둘 다 디자인 비전공자지만, 운이 좋게도 같은 분야로 함께 뛰어들어 서로의 피드백으로 한층 더 성장하는 관계가 되었고, 지금처럼 계속 서로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준다면 앞으로 더 성장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p.159
과거의 나는 외모에 대한 자기 검열이 심했는데,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엄마는 자신이 살면서 겪어 온 외모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딸이 똑같이 겪을까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수시로 검사했다. 살이 찐 건 아닌지, 오늘 눈썹이 잘못 그려져서 우스꽝스럽진 않은지, 블러셔가 과하진 않은지, 옷은 어울리게 입었는지, 출근하기 전 아침 식사 때마다 나를 확인했다.
--- p.173
이러한 비교 속에서 일상에서 소소한 성취를 이뤄내고 있는, 더 멋있어진 지금의 내가 보인다.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는 시속 1,300km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전혀 그 속도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의 성장도 지구의 자전과 같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자신과 비교해 보면 매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 다만 그 속도를 체감하지 못할 뿐. 나는 앞으로도 계속 성장해 갈 나, 그리고 우리를 응원하고 사랑하고자 한다.
--- p.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