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아버지가 완전히 불타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버지의 좋은 점은 그대로 있고, 아버지 마음속에 사는 괴물들은 모조리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서 완전히 새로운 아버지로 다시 만들어진다면?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을 살아가려면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만, 인생을 이해하는 일은 뒤돌아보아야만 가능하다.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는 주변 풍경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 「검은불난초: 소유욕」
엄마는 왜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로 꽃들과 말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어째서 완전히 다른 두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앨리스의 첫울음으로 풀려났다는 엄마의 저주는 무엇이었을까? 비록 앨리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질문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지만, 그것들은 마치 잘못 삼켜 식도에 박힌 꼬투리처럼 목구멍에서 넘어오질 않았다.
--- 「플란넬꽃: 잃어버린 것을 찾다」
의사가 차가운 청진기를 앨리스의 가슴에 갖다 대고 귀를 기울였다. 저 청진기로 마음속 질문들을 듣는 것일까?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고 앨리스에게 대답을 해 주려는 것일까? 앨리스 스스로도 진짜 듣고 싶은지 확신할 수 없는 대답을?
--- 「채색깃털꽃: 눈물」
손필드는 꽃과 여인들이 활짝 피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구든 손필드를 찾아오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의 인생을 짓밟고 방해하는 온갖 요인들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아들 클렘이 떠난 뒤, 준은 온몸을 던져 손필드를 아름답고 평화로운 피난처이자 번영의 장소로 만들었다. 준은 자기를 믿고 찾아온 여인들의 생명줄인 야생화 농장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아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결심을 유서로 명시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파헤치기보다 썩어 문드러지든 말든 그냥 묻어 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 「노란종: 이방인에 대한 환대」
마음속 깊고 어두운 곳이 부풀어 오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은 어째서 이렇게 짜며, 또 어째서 울어도 울어도 그치질 않는 것일까? 혹시 몸속 깊은 곳에 바다가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바닐라백합: 사랑의 전령사」
말 대신 꽃을 보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꽃이 어떻게 말 대신 얘기를 전할 수 있을까? 만약 앨리스가 가진 동화책 중 하나가 글자가 아니라 꽃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책은 어떤 모양일까?
--- 「보라까마중: 매혹, 마술」
준은 때때로 딱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럴 때면 온몸이 그 열망으로 부풀어 올라 숨이라도 한 번 크게 들이마시면 몸이 터져서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았다. 아그네스에 대한 앨리스의 갈망도 자신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준은 그만큼 더 괴로웠다. 역사의 순환성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 「강백합: 숨겨진 사랑」
준은 지쳐 있었다. 고통스러워 기억하기도 힘든 과거의 무게를 견디는 데 지쳤고, 사람들이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꽃들에 지쳤다. 비통함과 고립과 유령들에 지쳤으며, 오해받는 데 지쳤다. 앨리스에게 가족 이야기를 해 주는 문제도 그랬다. 손필드의 야생화들 사이에서 자라는 무수한 비밀에 대한 비난을 자기 혼자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버거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과거란 놈은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새순을 틔우죠. 이런 이야기들은 잘 다루어야 해요. 그것들은 저 스스로 싹을 틔우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 「쿠타문드라와틀: 내게는 치유해야 할 상처가 있다」
세상에는 말을 꺼내기가 너무 힘든 얘기가 있다. 그리고 떠올리기가 너무 힘든 기억도 있고, 알기가 두려운 진실도 있다.
죄책감이란 놈은 이상한 종자라 더 깊이 심을수록 더 기를 쓰고 피어나려 한다.
--- 「구리잔: 항복」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앨리스의 유년기는 오래전에 끝났다는 사실을. 트윅도 캔디도 준도 앨리스의 눈 깊은 곳에서는 아그네스의 낭만적 기질과 클렘의 충동적이고 무모한 기질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을 이제는 하지 않았다. 가끔 집에서든 꽃밭에서든 앨리스가 캔디 옆을 지나칠 때면 어딘가에서 불이 난 것처럼 캔디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곤 했다. 캔디는 앨리스의 마음속 어딘가에 불길이 옮겨붙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 「리버레드검: 황홀감」
앨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준이 말로는 할 수 없는 말들을 전하는 꽃을 키우는 땅 밑에, 자신의 가족사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다만 어디를 파내야 하는지를 모를 뿐. 앨리스가 꽃무리를 몇 시간 동안 조른 끝에 대충 꿰맞출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단순한 사실뿐이었다. 그것은 자기 가문의 여인 중에서 운명과 사랑의 덫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 할머니인 준조차 그것에 면역이 되지 않았다는 것. 운명과 사랑이 준의 인생을 통째 집어삼킨 다음 뱉어 낸 것이 지금의 준의 모습이었다.
--- 「파란숙녀난초: 사랑에 사로잡히다」
“정말 끔찍할 거야.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 알아야 하는 진실을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고쳐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을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 게 너무나도 두려워서 그냥 비난을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게 말이야.”
--- 「쓴완두가시금작화: 심술궂은 미인」
사막에는 앨리스에게 위안을 주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마치 효험 있는 약처럼. 불타는 듯 붉은 흙의 색깔과 손을 오목하게 해서 퍼 올릴 때 느껴지는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흙의 감촉. 음악 같은 새들의 지저귐. 매일의 시작과 끝을 물들이는 아름다운 노을. 따듯한 바람, 은빛과 초록빛과 푸른빛의 유칼립투스 잎사귀들, 구름이 헤엄치는 끝없이 펼쳐진 하늘, 그리고 무엇보다 강바닥에서 나무뿌리와 돌멩이 사이에서 자라나는 야생화들. 앨리스는 꽃들을 따서 공책 사이에 끼워 압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꽃들의 친숙함이 자기에게 커다란 위안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
--- 「오렌지밀짚국화: 정해진 운명」
앨리스는 사막에서 몇 주를 보낸 뒤 자신이 우주의 작은 점처럼, 철저한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야릇한 기분을 즐기게 되었다. 그건 마치 언제든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로 재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 「펄솔트부시: 나의 숨은 가치」
루비는 통나무 위에 앉아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을 뺐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잃어버린 가족의 무게가 그녀 주위로 내려앉았다. 엄마와 강제로 떨어져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루비의 삶에서 변치 않는 한 가지는 부재(不在)하는 가족의 현존(現存)이었다. 일종의 불가시성의 가시성이라고나 할까. 루비가 볼 수 있었던 모든 것은 루비 옆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 「스터트사막완두: 용기를 가져, 힘을 내」
앨리스는 늦은 밤 혼자 있을 때면 야생화 공책을 꺼냈다. 언제부턴가 그 공책은 마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처럼 앨리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앨리스는 그 공책에다 꽃을 눌러 붙이고 스케치를 하고 자기 이야기를 기록했다. 외로움과 혼란스러움으로 점철되었던 어린 시절, 엄마 없이 살아왔던 삶, 분노, 슬픔, 두려움, 죄책감. 이루지 못한 꿈, 참회 그리고 사랑을 향한 갈망에 대해…….
--- 「스피니펙스: 위험한 기쁨」
하늘의 온갖 빛깔들이 협곡의 벽면과 유리 같은 샛강의 수면 위로 쏟아져 내려와서는 빛의 소용돌이가 되어 다시 반사되어 올라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협곡과 샛강이 우묵한 그릇 모양의 거울처럼 서로를 반사하면서 불타는 낙조에 흠뻑 물들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앨리스는 동화책에서 읽었던, 기적처럼 계속 채워지는 마법의 잔이나 깊은 곳에 천국을 품고 있다는 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 「활엽파라킬야: 너의 사랑으로 하여 나는 살고 죽노라」
앨리스는 사막의 보물들을 차례차례 하나씩 만났다. 파스텔핑크빛과 샛노란 밀짚꽃, 회색과 잿빛이 섞인 깃털들, 꽃눈이 주렁주렁 매달린 유칼립투스 가지들……. 앨리스는 땅의 온기를 들이마시고, 병정게의 파란색과 피피조개의 오묘한 보랏빛이 혼합된 하늘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사막은 바다의 오래된 꿈이죠.’ 앨리스는 딜런과 처음 해돋이를 보았던 때를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핍과 자주 올랐던 운석공 외벽을 오르면서 벅찬 감회에 젖었다. 그때는 마치 다른 행성에 떨어진 외계인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불확실했는데, 이제 보람된 직업도 가졌고 평생 몰랐던 사랑을 알게 해 준 남자도 만났으니…….
--- 「사막오크: 부활」
앨리스는 부서진 조각이었다. 붙여졌다가 다시 깨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도자기 조각. 끊임없이 자신을 부수고 망가뜨리는 남자를 넘어선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엄마처럼. 안전한 삶을 찾아 손필드로 온 꽃무리처럼. 앨리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걸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때로는 되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 「박쥐날개산호나무: 마음의 병을 치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