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에 디터 람스는 『좋은 디자인이 갖추어야 할 열 가지 조건』을 저술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이론화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1970년대부터였다. 간결하게 축약된 이 열 가지 요점은 현대 디자인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다. 또한 이를 만든 람스야말로 공히 기념비적인 존재다. 그의 작품들, 그중에서도 전자제품 제조업체인 브라운 사에서의 작업은 이 원칙들의 진화에 기여했다.
유용성은 오늘날까지도 모던 디자인에서 오랜 논쟁의 대상이다. 기능과 미학의 대결에서 누가 승자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디자이너들은 사용자가 제품을 사용하는 방식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이들에게 미적인 측면은 문제가 아니거나 적어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디자이너들은 실용적인 기능보다는 모양을 중시하고, 기능적 측면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더라도 더 아름답게 보이는 쪽을 택한다. 두 가지 요소가 서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룰 뿐만이 아니라, 디터 람스의 말을 빌리자면, 기능은 제품을 압도하지 않으면서 디자인에 의해 드러나야 한다. 시각적인 면이 기능적인 면을 자연스럽게 표출한다 하더라도 제품을 사용할 때 사용자들은 기능적인 면만이 아니라 시각적인 면도 즐겨야 한다. 현대의 디자이너들은 두 가지 측면을 전문적으로 조화시킨다.
라이프 클락은 사람들이 긴급 상황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고안, 설계되었다. 모서리가 둥근 날렵한 몸체 안에는 진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생존 키트가 담겨 있다. 2008년 이석우 디자이너가 만든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 SWNA가 라이프 클락을 디자인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디자인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엄청나게 열정적인 전문가 집단이다. 우리가 단순히 일차원적인 디자이너가 아니라 사상가이자 혁신가이며 개척자인, 3차원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유용함은 아름다울 수 있고, 또 아름다워야만 한다. 이 두 가지 기준이 모든 디자인 제품과 우리와의 관계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것들은 우리 일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을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도구들이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만족시켜 주며 우리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해 줄 때 비로소 만족감과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나 물건이 주는 미적인 즐거움 역시 그만큼이나 중요하며 실용성을 보완한다. 미학은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물건의 기능적 면을 아우를 때에야 진정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미학은 사용자에게 활기를 줄 수도 있고, 삶의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스트레스를 낮출 수도 있다. 단순하고 우아한 동시에 유용한 디자인 제품들로 채워진 실내는 그와 비슷한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기술과 소재의 발전 덕분에 유용성과 결합된 미학은 더욱 실험적인 접근이 가능해졌다. 어떤 경우라도, 실용성은 분명 더 이상 꼴사나움과 동의어가 아니다.
2015년에 디자이너 서진이 설립한 스튜디오 오리진은 가구, 제품, 공간 및 콘셉트 리서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한 프로젝트들을 작업한다. 주로 사람과 물건 및 환경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을 선보이는데, 컬러 플로우는 지금까지 스튜디오 오리진에서 선보인 뛰어난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면서도 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옷장 표면은 마치 렌즈처럼 되어 있다. 사용자의 위치나 움직임에 따라, 말 그대로 색을 바꾼다. 컬러 플로우는 단순히 컬러풀한 가구가 아니다. 인터랙티브 디자인은 실제 사용자가 있어야 해당 디자인이 보여 줄 수 있는 최대치를, 그리고 극도로 아름다운 잠재력을 보여 줄 수 있다. 이 제품은 사용자가 다양한 각도에서 볼 때마다 색깔이 바뀌는 장관을 선사하기에 매순간 인테리어가 달라진다. 서진은 이렇게 말한다. “사용자의 위치와 움직임에 따라 색이 바뀌면, 사용자는 즉각적으로 가구와 자신과의 연결을 인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보다 역동적이고 즐겁게 가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소통할 수 있다.”
애니씽 컬렉션은 대중이 쓸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온 유명한 덴마크 브랜드인 헤이를 위해 디자인되었다. “헤이의 지속적인 비전은 세계에서 가장 재능 있고 호기심 많고 용감한 디자이너들과 협력해 간단하고 기능적이면서도 심미적인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다.” 헤이의 정신에 어우러지게, 소더의 사무용품 컬렉션은 다른 책상용 문구들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플라스틱 틀 속에 숨겨진 단순한 형태는 사무용품 디자인이 끼칠 수 있는 해악의 치유제다. 소더의 컬렉션은 사용자들이 사무실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게 한다. 한 손으로 쉽게 잡을 수 있는 스테이플러는 서류에 충분한 힘을 줄 수 있도록 상당히 육중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테이프도 일반적인 것보다 높은 디스펜서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다른 손으로 몸통을 잡지 않고도 필요한 만큼 테이프를 잘라 낼 수 있다. 알맞은 크기에 균형이 잘 잡힌 스탠드에 꽂혀 있는 가위는 쉽게 꺼내 쓸 수 있다. 이 컬렉션은 세 가지 무광 색상이다. 어느 사무실에서나 미니멀하고 세련된 느낌을 더해 줄 것이고, 업무에 소중한 도움이 될 것이다.
영국 출신 디자이너인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이 펜은 라미의 포트폴리오에서 새로운 필기도구 시리즈를 개시했다. 늘씬하고 완벽한 비율의 펜 몸통, 직선적인 클립과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의 스프링으로 미니멀리스트다운 외형을 강조했다. 라미는 이렇게 설명한다. “라미 아이온은 절대적인 모던함을 드러내는데, 특히 세부 요소들에서 이를 명백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라미 만년필에는 해당 시리즈만이 가진 특징이 있다. 바로 새롭게 만든 펜촉이다. 재스퍼 모리슨은 이 펜촉의 윤곽을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비율로 만들었으며, 이로써 필기구에 아방가르드한 특성을 부여했다.”
놈 아키텍츠는 재능 있는 팀을 꾸려 산업 디자인 및 주거 건축 분야만이 아니라 상업 공간 인테리어, 사진 및 아트 디렉팅 등의 분야에서도 두루 활동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고 시대를 초월한 미학과 천연 소재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절제와 품위라는 모더니스트적 원칙을 지킨다. 또한 디자인에서 품질, 디테일 및 내구성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의 프로젝트들은 개인적 선호를 떠나 어떤 것이 인간의 감각을 고양시킬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공간, 물건, 개념 및 이미지들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되돌린다. 우리의 작업은 균형을 찾는 일이다. 이 균형은 더할 것도, 덜어 낼 것도 없는 상태다.”
그것만으로 디터 람스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또 하나가 있다. 바로 ‘디자인 10계명’이다. 디터 람스 전시회가 흥행한 이유 중에는 이 10계명이 한몫했을 가능성이 크다. 람스의 10계명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하다. “디자인 10계명, 그게 도대체 뭐야? 나도 한번 보고 싶다.” 이와 같은 호기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언어다. 기사로 쓰기에도 훌륭하다. 모세의 10계명처럼 디자이너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어떤 숭고한 원칙이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10계명은 매우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전시회, 조너선 아이브의 애플, 그리고 간명한 디자인 10계명. 이것으로 람스 현상이 납득되었을까? 정말 마지막 하나가 더 있다. 이제 그것을 이야기해 보자.
게리 허스트윗 감독의 영화 《디터 람스》에서 람스는 미래 자동차 디자인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더 빠른 게 필요치 않아요. 우리는 더 현명하고 더 나은 것이 필요합니다. (중략) 미디어에서조차도 디자인을 점점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미화’라는 용어가 싫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아름다운 것만을 만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는 더 나은 것을 만들려고 하고, 이것은 제가 항상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죠.” 21세기에 들어와 전 세계는 다시 한 번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의 대유행이다. 역시 기후 위기의 일환이다. 정말로 소비가 아니라 생태를 위한 디자인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 변화가 다시금 디터 람스를 호출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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