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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7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127쪽 | 188g | 124*194*9mm
ISBN13 9791189898540
ISBN10 1189898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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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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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 풍경〉


집이 없는 비둘기는 자정이 넘어도 냇가를 떠나지 못했다. 비둘기 닮은 아이들 서넛, 자식을 버린 아버지를 욕하며 싸구려 술에 취해가고. 주황빛 휘황한 가로등은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위로가 사라진 세상, 가난한 연인은 서로를 연민하기엔 지나치게 야위었다. 그녀 무릎에 올린 그의 손은 이미 식어 차갑고.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자전거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나. 저토록 아픈 고성방가는 누구의 죄를 묻는 것인지. 잠이 사라진 여름밤, 오층 창가에 서서 쓸쓸한 바깥 지켜보는 나를 얼룩진 달이 내려다보고. 물소리마저 숨을 죽인다.

* * * * * *

〈출생의 비밀〉


범선으로 요하네스버그를 떠나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아버지는 목덜미에 나비를 문신한 인도계 아프리카인. 파타고니아에서 태어나 해변으로 밀려온 혹등고래를 치료해준 엄마는 마드리드 뱃사람과 아르헨티나 원주민의 피가 섞인 붉은 얼굴의 메스티소였다.

바나나를 따서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군도를 오가던 아버지는 초록빛 빙산을 타고 보라보라섬 사촌언니를 찾아온 엄마를 에메랄드빛 산호초가 꺼이꺼이 우는 타히티 북부 갈대숲에서 만났다. 1871년 여름이었다.

엄마는 망고스틴 여섯 개를 건네는 아버지의 흙 묻은 손바닥을 얼굴로 가져가 달콤하게 핥았다. 둘이 몸을 섞은 얕은 바다에선 일만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맹그로브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웅얼거렸다. 원주민들은 뜨지 않는 달을 기다렸다.

여섯 달 후. 아버지는 이슬람 양식으로 조각된 여신상을
실은 목선을 타고 바그다드로 떠났다. 움직이는 섬에 오른 엄마 역시 북서쪽으로 흘러갔다. 외눈박이 숙부가 야자유 일곱 병을 들고 나와 배웅했다. 동아시아 낯선 항구에 도착한 엄마는 백 년 후 사내아이를 낳았다. 나는 1971년 부산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다.

* * * * * *

〈길 위의 방〉


소진한 기력으론 신을 만나지 못한다
황무지에 달이 뜨면
갸르릉 도둑고양이 울고
집 나간 누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 밥상에 마주 앉은 데드마스크들
시간은 석고처럼 창백하게 굳고
조롱의 숟가락질, 싸늘한 만찬이 끝나면
표정 없이 젖은 침대에 드는 사람들

어쨌거나 창 너머 달은 또 뜨는데
째각대는 시계 소리에 맞춰 계단을 올라
어둡고 축축한 방, 문을 열면
나신의 엄마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하얀 비포장길
꿈에서도 달맞이꽃은 흐드러졌는데
길을 잃은 자, 길 위에는 방이 없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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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열면 벼랑 끝에 홀로 남은 장수의 긴 칼날 위로 흐르는 피가 보인다. 요즘의 소심한 사무원 같은 시에 익숙한 독자들은 홍 시인의 장대한 호흡에 숨이 가쁠 것이다. 특히 수작들의 성전인 2부 ?출생의 비밀?은 대하장강 같은 서사시를 압축한 백미 중의 백미다.?이 시집에는 홍성식 시인이 그 ‘누구에게도 발설치 못한 아득한 진실’이 숨어 있다. 하늘이 이미 그를 용서한 진실이다. 용서하지 않아도 ‘구포시장 좌판의 빨간 자두’ 하나에 내 가슴은 이미 무너졌다. 그런데?시집을 닫을 때까지도 홍 시인은 끝내 칼의 피를 닦지 않는다.
- 이산하 (시인)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생을 저주하는 자가 있다. 포구의 좌판에서, 소도시 뒷골목에서, 이국의 여행지에서 힘겹게 삶을 꿰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거친 노래를 대신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 홍성식이다. 그는 가여운 자들을 위해, 그들의 낮은 목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해 마이크를 든 자멸의 가수다. 그의 노래 앞에서 생은 이다지고 가엽고, 이다지도 뜨겁다. 느끼하고 환희로운 생을 살았던 자, 이 시집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 허연 (시인)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생을 저주하는 자가 있다. 포구의 좌판에서, 소도시 뒷골목에서, 이국의 여행지에서 힘겹게 삶을 꿰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거친 노래를 대신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 홍성식이다. 그는 가여운 자들을 위해, 그들의 낮은 목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해 마이크를 든 자멸의 가수다. 그의 노래 앞에서 생은 이다지고 가엽고, 이다지도 뜨겁다. 느끼하고 환희로운 생을 살았던 자, 이 시집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 허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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