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신분을 막론하고 즐기는 개고기 요리였는데, 어떤 사람은 남이 해 주는 것으로는 성미가 차지 않아 본인이 직접 요리를 했던 모양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광욱은 이런 시를 남겼다.
닭찜 개찜 올벼(早稻) 점심 날 시키십시오.
그렇다면 김광욱은 개장보다 어려운 개찜을 직접 만들었던 걸까?
한편 조금 후대로 가면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고 레시피까지 적어 남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약용이다.
고기가 먹고 싶어!
어느 날 정약전(丁若銓)은 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신유박해 때 정씨 형제 중 셋째인 정약종(丁若鍾)은 사형을 당했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丁若鏞)은 강진으로 유배당한다. 여기까지도 힘들고 억울한데, 정약전은 섬에서 살다 보니 있는 게 물고기뿐이라 소나 돼지 같은 네 발 달린 짐승의 고기가 몹시도 먹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동생에게 하소연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대한 동생 정약용의 답장은 이랬다.
개를 드십시오!
동생의 말은 이랬다. 섬에 산개, 곧 들개가 많을 테니 그걸 잡아드시라고. 그러면서 개를 잡는 덫을 만드는 법을 알려 준 것은 물론, 레시피까지 적어 보냈다.
정약용의 개고기 요리법은 이렇다. 먼저 잡은 개를 달아매서 먼지가 안 묻게 가죽을 벗기고, 창자와 밥통만 씻고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않는다. 그런 뒤 맑은 물을 팔팔 끓이고, 여기에 고기를 넣어 삶아 낸 뒤, 식초와 간장, 기름, 파로 양념을 해서 볶거나 삶으면 아주 맛있다는 것이다. 또 개를 잡는 덫을 만드는 방법도 알려 주고, 같이 넣어 먹으라고 들깨 한 말을 형에게 보내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지극정성의 동생이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이 레시피는 정약용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의 개고기 요리법’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대중적으로 즐긴 음식 개고기- 개고기 삶는 실학자」중에서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무려 9개월에 달하는 기나긴 여정이었고, 결국 새로운 해를 머나먼 타지에서 맞게 되었다. 12월 29일, 섣달그믐이 되었는데 바람도 세고, 일본 사람들도 명절이라 일을 하지 않아 배가 떠나지 않는다. 나그네 심사에 침울해진 신유한은 근처 마을의 풍광을 보고, 멋지고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며, 떡을 차곡차곡 쌓고 음식을 차려 둔 일본의 설날상도 구경도 했다. 그러다가 대마도주가 보내 온 밥상을 받게 되었다.
마침 거센 바람이 불어와 베개와 이불이 멋대로 춤을 추는 배 안에서 신유한은 겨자장에 비빈 생선회도 먹고, 고기를 다져 떡국도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이 떡국은 찹쌀떡 둥근 것 두 개를 그릇에 넣고 물과 조선간장(감장)을 타서 만든 ‘가짜’ 떡국이었다. 신유한은 ‘조금 시지만 먹을 만했다’라고 했다. 고향의 맛을 떠올리며 이 떡국을 먹노라니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 나이 드신 어머니가 내년에는 66세이신데
내가 오늘밤 풍파 한복판의 조각배에 타고 있는 걸 모르시겠지.
이렇게 신유한은 서러움과 그리움에 겨워 폭풍처럼 시를 열 수나 지었으니, 역시 설날의 떡국 한 그릇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이번에는 정조 15년(1791), 중국을 방문하는 사신의 일행에 동행한 김정중(金正中)이 쓴 《기유록奇遊錄》을 보자. 김정중이 중국에서 1월 2일을 맞이하여 요란하게 폭죽 터뜨리는 설맞이 축제를 보고 떠올린 음식은 떡국이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찾아오고, 자신도 그들의 집에 놀러가 떡국과 만두를 먹으며 신나게 놀았던 것을 떠올리며 고향에 계신 형님이 자신을 그리워하겠거니 생각하며 슬퍼했다.
어떻게 한 집에 모여서 새해의 즐거움을 함께 할 것인가?
이런 한탄에서도 엿보이듯, 이미 설날의 떡국은 조선 사람들에겐 너무도 당연한 풍습이 되었고, 때맞춰 먹지 못 하면 매우 서러워지는 음식이었다. 그래서일까, 효종-숙종 때의 송시열은 《구황촬요(救荒撮要)》의 서문을 쓰면서 ‘겨울에 얼어 죽는 일 없고 새해에 큰 대접의 떡국(大椀不托)을 먹기를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이 책이 백성의 굶주림을 해갈하기 위한 것임을 생각하면, 설날의 떡국은 새해맞이의 일상 및 풍족함 등도 상징했던 것 같다. 양반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평범한 음식의 비범한 역사 떡국 - 그리운 떡국, 슬픈 떡국」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