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팸플릿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졌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금기로 여긴 ‘북한’이란 벽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먼 훗날의 과제로 여기던 반제국주의 투쟁과 통일운동을 지금 당장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반제국주의는 ‘반미’라는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가시화했다. 이전의 학생운동과 전혀 다른 새로운 조류의 출현이었다. --- p.22~23
“주사파와 우리식 사회주의가 제한된 학생들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다. 북한은 학원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까지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학생들은 사상적 방황을 하다가 주사파에 말려든다. 베이징에서 김일성대학 학생회장을 만난 일이 있는데, 남한 학생들의 공산화는 시간문제라고 호언했다. 일부 학생은 남조선 해방을 위해 가을에 또 이슈를 만들어 나올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반대와 미군 기지 반납 서명운동을 벌일 것이다. 북에서 이미 지시를 했다. 내가 증거를 갖고 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북한 사노청,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학생들은 팩시밀리를 통해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 --- p.77~78
1990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과 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올랐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전경련)나 대기업보다 앞선 순위였다. 수만 명의 학생이 일사불란하게 ‘구국의 강철대오’를 외칠 때, 전대협은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1년 분신정국과 강경대 사망사건을 정점으로 영향력이 꺾였고, 1996년 전대협 후신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총련)의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급격히 퇴조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엇이 학생운동의 결정적인 후퇴를 가져왔을까? 학생운동의 조직과 영향력 확대에 기여했던 NL 사조는 어떤 질곡으로 작용한 것일까? --- p.126
“1987년 6월항쟁만 하더라도 그걸 이끌어가는 야당이 있고, 재야의 스타급 인사들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촛불집회를 이끌어가는 건 초등학생부터 청소년, 회사원, 노인까지 일반 시민의 ‘집단지성’이다. 오히려 정당과 단체는 그 뒤를 따라간다. 정치지도자가 대중을 이끄는 게 아니라 대중이 정치지도자를 이끄는 시대, 곧 리더십이 쌍방향으로 흐르는 시대다. 굳이 ‘NL’이란 프리즘으로 보자면, NL의 대중노선이 오늘에 맞게 재구성되고 재구현된 게 창조적 다수로서의 ‘시민’이 아닌가 싶다.” --- p.175~176
수많은 젊음이 ‘광주 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몸을 던지던 시절이 있었다. ‘열사’라는 호칭이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던 시절이었다. ‘열사의 시대’는 갔다. ‘열사’라는 단어조차 낯설게 느끼는 시대다. ‘열사’는 어떤 상황에서 탄생해서 사회적 함의를 획득했고, 어떻게 소멸해간 것일까.……‘열사’와 ‘광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열사’는 폭압적인 정권 또는 체제에 맞선 저항의 상징이자 추모의 대상을 뜻한다. 열사의 등장은 198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특정 시점에 일어난 사회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 p.253
저항적 자살이 잇따른 또 다른 시기는 1991년이었다. 그해에 모두 11명이 분신했고, 그중 9명은 흔히 ‘분신정국’이라 불린 5월투쟁 기간에 몸을 살랐다.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교내시위 도중 경찰 폭행으로 숨졌다. 강경대의 죽음은 5월 내내 1987년 6월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시위를 불러왔다. 또 이 기간에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차태권, 김철수, 정상순이 분신했다.……하지만 5월투쟁과 잇따른 분신은 오히려 학생운동을 비롯한 전체 저항운동의 약화와 고립을 가져왔다. 공안세력은 ‘김기설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해냈고, “분신의 조직적 배후가 있다”는 프레임으로 대중과 운동권을 분리했다. 폭압적 독재정권 아래서 운동을 확산하는 역할을 했던 저항적 자살은 그 의미를 다해가고 있었다. --- p.261~262
민노당과 통진당은 대중정당을 지향했고,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성장했다. ‘경기동부’는 그런 대중정당의 정파로서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 전체 당원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정당에 표를 던진 수많은 일반 유권자의 요구를 강고한 조직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만한 착각이었다. 대중활동에서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경기동부가 잊고 있었던 건, 진보정당 역시 대중정당이란 사실이었다.
--- p.31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