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정치적 역할이 가장 두드러진 경우는 수렴청정이다. 물론 수렴청정은 왕비가 왕실의 어머니인 대비나 할머니인 대왕대비 때 행사할 수 있는 정치 형태였다. 수렴청정은 발을 드리우고 정치를 한다는 뜻이다. 발을 치는 것은 유교적 문화의 소산이다. 대비가 왕과 왕실의 보호를 위해 정치에 참여하지만, 여성인 만큼 내외법에 따라 발을 쳐서 남성인 신료들과의 직접 대면을 막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정치 참여는 중국 송나라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에서도 이를 참고하여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여성의 정치적 활동이 금지된 조선 왕조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손자나 아들인 왕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찬탈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반대로 모성과 부덕을 기반으로 어린 왕을 정적들로부터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들어가는 말: 극한직업, 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은?」 중에서
정도전의 기세가 등등했을 때 방원은 사병을 폐하고 무기들을 모두 불에 태워버렸지만, 민씨는 몰래 병장기를 준비하여 변고에 대응하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훗날 1398년 8월 1차 왕자의 난 때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왕자의 난 당일에도 민씨는 몸이 불편한 태조 곁에서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로 불러내서 정도전을 공격하는 데 일조한다. 그녀의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과 함께 친정으로 빼돌렸던 무기와 사병을 빼내 방원이 정도전과 남은을 기습하게 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것이었다.1400년 방간과 박포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2차 왕자의 난 때도 “골육을 서로 해치는 것은 불의가 심한 일이다. 내가 무슨 일로 응전하겠는가?”라고 방원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한 겹으로 지은 옷)를 더하고, 대의(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큰 도리)에 의거하여 권하며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는 《정종실록》의 기록처럼 민씨는 남편이 정치적 고비를 겪을 때마다 당찬 여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 「정치적 동반자 원경왕후 민씨, 팽을 당하다」 중에서
1418년 세종이 왕으로 즉위한 순간부터 그녀에게는 시련이 닥쳐오기 시작했다. 상왕인 태종은 왕권 강화에 주력했고 이 과정에서 왕비의 친정인 심씨 가문은 크게 화를 입었다. 태종은 심온을 역모 혐의로 처형했고 심온의 부인과 자식들은 관노비로 삼게 했다. 화의 여파는 왕비에게까지 미쳤다. 유정현, 박은 등은 “그 아버지가 죄가 있으니, 그 딸이 마땅히 왕비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며 폐비까지 건의했다. 다행히 상왕 태종은 “그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딸이 후비가 된 일은 옛날에도 또한 있었으며, 하물며 형률에도 연좌한다는 명문이 없으므로, 내가 이미 공비에게 밥을 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니, 경 등은 마땅히 이 뜻을 알라”면서 소헌왕후가 왕비의 자리를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자신이 왕비가 된 순간에 맞이한 친정아버지의 죽음과 친정어머니의 노비 전락은 그녀의 마음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을 것이다. 태종의 조치가 워낙 강경하여 남편인 세종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왕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슴에서 울분을 삭이는
일뿐이었다.
--- 「소헌왕후 심씨, 친정의 몰락을 극복한 왕비」 중에서
단종이 노산군이 되면서 정순왕후 역시 부인으로 강등되었고, 동대문 밖에서 거처하며 채 외롭고 고달픈 삶을 이어 갔다. 현재의 종로구 창신동에는 ‘자지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 밑에 샘물의 흔적이 보인다. ‘자지동천’은 ‘자줏빛 풀이 넘치는 샘물’이란 뜻으로, 흰 옷감을 이곳에 넣으면 자줏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옷감을 물들이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정순왕후는 18세 때인 1457년 단종과 사별한 후 숱한 시련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64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중종 때인 1521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세종 때 출생한 그녀는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등 무려 8명의 왕과 함께 한세상을 보낸 셈이다. 그녀의 무덤은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 집안 종중의 산이 있는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에 대군부인의 묘로 조성되었다.
--- 「정순왕후 송씨, 짧았던 왕비 생활 뒤 긴 시련」 중에서
윤씨의 투기에 대해 어머니까지 적극 나서자 성종은 윤씨의 출궁을 결심했다. 성종이 후궁을 찾은 것에 반발해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두 사람의 파국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며느리의 과격한 행동을 참다못해 인수대비는 마침내 성종에게 윤씨를 폐위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1479년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비가 사가로 쫓겨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가 크게 노하여 왕의 노여움을 돋우어 외정에서 대신에게 보이니 윤필상 등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견을 아뢰어 윤비를 폐하여 사제로 내치도록 하였다”는 《소문쇄록》의 기록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폐출을 주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왕비의 폐출이라는 초유의 사건 직후인 1480년에는 어을우동 스캔들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어을우동은 성리학 이념의 정착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인물로 찍혀 결국은 교형(목을 옭아매어 죽이는 형벌)으로 생을 마감했다. 처형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으나 성종의 의지는 단호했다. 어을우동과 폐비 윤씨 사건이 터지기 전인 1475년 소혜왕후는 《내훈》을 집필한 바 있다. 성리학 이념을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모범적으로 성리학 규범을 준수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 「왕의 어머니로서의 강한 존재감, 소혜왕후 한씨」 중에서
1494년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독재 군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서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엄씨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정씨에게 자루를 뒤집어 씌우고 그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매질을 가하게 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이어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마저 죽이고 손에 장검을 든 채 자순왕대비(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침전 밖에서 인수대비에게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며 큰 소리로 연달아 외쳤다. 이때 “왕비 신씨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대비들에게도 마음대로 하는 연산군을 그나마 제어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관계는 말년까지 비교적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 「연산군의 왕비라는 이유로, 폐비 신씨」 중에서
그녀의 운명을 바꾼 가장 큰 사건은 바로 1506년 9월 2일에 일어난 중종반정이었다. 반정 주체 세력은 연산군을 대신할 왕으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지목하고 진성대군의 집을 찾았다. 연산군의 폭정이 지속되면서 자신도 정치적 희생물이 될 것을 염려한 진성대군은 선뜻 문 밖을 나서지 못했다. 이때 위기 속에서 지혜를 발휘한 여인이 단경왕후였다.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판단하자는 것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반정하던 날 먼저 군사를 보내어 사제(중종이 있던 집)를 에워쌌는데, 대개 해칠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임금이 놀라 자결하려고 하자 부인 신씨가 말하기를 ‘군사의 말 머리가 이 궁을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말 꼬리가 궁을 향하고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으면 반드시 공자를 호위하려는 뜻이니,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소매를 붙잡고 굳이 말리며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였더니 말 머리가 과연 밖을 향해 있었다”는 기록에서 위기의 상황에서 남편을 구한 왕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애정이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경왕후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왕비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최측근 세력이었다는 점이 반정 세력에게는 큰 걸림돌로 다가왔다.
--- 「7일간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 중에서
영창대군의 죽음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인물은 인목왕후였다. 광해군과 법적으로는 모자 사이였지만 이제 두 사람은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다. 어색하게 지속되던 모자 관계는 1615년 추운 겨울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서궁(현재의 덕수궁)에 모셔놓고 혼자만 창덕궁으로 돌아오면서 갈등으로 치닫는다. 1623년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의 죄상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인목왕후의 서궁 유폐가 시작된 것이다. 1615년 광해군은 교서를 반포해 흉측한 글을 유포시킨 인목왕후의 죄상을 알리고 이에 연루된 나인들을 처형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인목왕후가 서궁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음은 궁녀의 기록으로 보이는 《계축일기》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또한 《인조실록》에는 “상(인조)이 처음 대궐에 들어가 즉시 김자점과 이시방을 보내 왕대비(인목왕후)에게 반정한 뜻을 계달하자, 대비가 하교하기를 ‘10년 동안의 유폐 중에 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도 없이 이처럼 직접 계문하는가?’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서궁에서 대비로서의 대우를 전혀받지 못한 인목왕후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 「영창대군의 증살 이후 서궁에 유폐된 인목왕후 김씨」 중에서
1637년 삼전도에서 약속했던 항복의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인질의 신분이 되어 심양으로 향했다. 1637년 4월 10일 소현세자는 심양에 도착하여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나그네를 치거나 묵게 하는 집)인 동관에 머물렀다. 5월 7일 황제가 세자를 위해 새로 지은 관소인 신관, 즉 심양관으로 옮겼고세자는 이곳에서 8년을 머물렀다. 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하여 배종신(수행신하), 수행원 및 부속 인원까지 포함하면 심양관의 상주 인원은 500명이 넘었다. 세자는 이곳에서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을 모집하여 땅을 경작했고 무역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강빈도 적극적으로 세자를 도왔다. 그러나 《인조실록》에는 “관소(각 고을에 설치하여 외국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숙소)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으므로, 왕(인조)이 그 사실을 듣고 불만스러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의 심양 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강했다. 심양에서 보낸 8년간의 인질 생활은 소현세자와 세자빈의 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청나라를 과거의 야만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치, 문화의 강국임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국제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갔다.
--- 「시아버지에게 사약을 받은 소현세자빈 강씨」 중에서
다행히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 날인 21일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갚아야 할 만한 은혜와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를 사도세자라 한다”고 하며 사도세자를 바로 복권시켰다. 이로써 헌경왕후는 나간 지 9일 만인 22일에 다시 궁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궁궐로 돌아온 헌경왕후는 영조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세손을 보호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헌경왕후는 재입궁 후 3개월이 지난 8월에야 영조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헌경왕후는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서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영조는 주로 경희궁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영조와 세손이 경희궁에 함께 거처하기를 청한 것이다. 헌경왕후는 자신의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에 대한 섭섭함보다는 오히려 그 처분을 이해한다면서 아들을 할아버지에게 맡긴 것이다. 영조는 헌경왕후가 상중에 거처했던 경춘전 남쪽의 작은 집에 가효당이라는 당호를 내리면서 그녀의 진심에 감격했다.
--- 「정조의 어머니이자 《한중록》의 저자, 헌경왕후 홍씨」 중에서
19세기 조선 정치사는 흔히 세도정치기로 정리된다. 그만큼 외척 세력에 의한 세도정치가 횡행하면서 왕권은 한없이 추락했다. 19세기 세도 가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성씨는 안동 김씨였다.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의 왕비 순원왕후(1789~1857) 배출 이후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절정을 이루었다. 순조의 왕비로 들어와 19세기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순원왕후, 그녀는 왕비였을까? 아니면 안동 김씨 세력의 대변자였을까? 순원왕후의 본관은 안동으로 1789년(정조 13) 5월 양생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조순, 어머니는 청송 심씨다. 김조순은 19세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전성기를 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안동 김씨는 17세기 김상용과 김상헌을 배출하면서 명문가로 성장했다. 19세기에 명문가로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된 데에는 정조와 김조순의 각별한 관계가 있었다. 김조순의 능력을 알아본 정조는 그를 세자(후의 순조)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기에 이르렀다.
--- 「왕비인가, 안동 김씨의 대변자인가? 순원왕후 김씨」 중에서
1858년 8세의 나이로 부친이 사망하자 한양 안국동의 감고당으로 갔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으로 인현왕후가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던 시기에도 살았던 곳이다. 감고당은 대대로 여흥 민씨 가문의 인물들이 살았고, 한양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던 명성황후는 가문의 배려로 이곳에 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감고당은 1960년대까지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1995년부터 추진된 여주시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2001년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 복원되었다. 안국동에서 8년 정도의 생활을 하던 1866년, 명성황후의 운명을 바꾸는 간택령이 내려졌다. 1863년 즉위한 고종의 왕비 간택령이 내려진 것이다. 당시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은 처가의 고녀(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있는, 상중에 있는 여자가 자기를 일컫는 말)인 명성황후에게 관심을 보였다.
--- 「근대의 격동기를 살아간, 명성황후 민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