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부산에는 새벽부터 비가 내리더니 낮이 되자 조금 갰다고 한다. 정홍명이 선온을 받들고 일본 사신들이 묵고 있던 객관客館으로 들어가니, 객사의 상관(정사)과 부관(부사)이 대문 밖에서 동쪽으로 향해 서 있고, 동래부사는 서쪽을 향하여 서 있다가 몸을 굽혀 공경히 맞았다. 선위사가 정문으로 들어가 선온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동쪽 가까이에서 서쪽을 향해 서니, 객사들이 네 번 절을 하고 차례로 올라가 예를 갖추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기생의 음악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정홍명은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홉 잔을 든 뒤에 중배례中杯禮를 하여 서서 마셨는데, 이때 부관 평지광(스기무라 우네메)이 선온宣?인 자소주紫燒酒를 마시며 잔을 완전히 비우더니 취하여 정신을 못 차리고 붙들려 나갔고, 현방(겐포)도 취하여 차분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 p.64
“1625년(인조 3) 인조 책봉을 위해 왔던 환관 왕민정王敏政은 조선에 오기 위해 명의 실권자 위충현魏忠賢에게 막대한 은화를 뇌물로 바치고 온 자였다. 그는 조선에서 13만 냥을 긁어갔다. 1634년 왕세자 책봉을 위해 왔던 노유녕盧維寧 또한 수만 냥을 챙겨갔다. 은에 눈이 멀어 조선에 왔던 당시의 칙사들이 변변한 기행문이나 시문집을 남겼을 리 없다. 17세기 초 30여 년 동안 조선에 왔던 명의 사신들은 명목은 칙사였지만 사실상 한 밑천 잡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강도’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그저 은이 넘쳐나는 일종의 ‘엘도라도’였던 셈이다.”--- p.38
“여기 전주를 떠나가면서 가는 도중의 벽촌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죽이고 있는 참상은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8월 28일] …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왔는데, 그 중에 사람을 사고 파는 자도 있어서 본진의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서 줄로 목을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는 모습은 지옥의 아방阿防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들이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고 생각될 정도이다. [11월 19일]”--- p.86
“·살인자: 살인당한 사람의 온몸을 식초와 더럽고 악취 나는 물로 씻은 후, 그 물을 깔때기로 살인자의 목에 붓고, 그 물이 가득 찬 뒤에는 곤봉을 가지고 배를 쳐 터뜨림.
·조선인들은 단지 12개의 국가만 알고 있으며, 우리를 남만국南蠻國으로 부름. 담배를 남만국에서 왔다고 생각하여 남빤코이nampancoij라 부르는데, 지금은 담배를 많이 피워 네댓 살 되는 아이들도 피움.
·방바닥의 아래에는 오븐 같은 것이 있는데, 겨울에는 날마다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함.
·기생 등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는 고관들은 사찰을 이용하며, 그래서 사찰이 도량보다는 매음굴이나 술집으로 이용되기도 함.
·그들은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관이나 숙소는 알지 못하며, 여행하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 자기가 먹을 만큼 쌀을 내놓으면 그 집주인은 즉시 그 쌀로 밥을 지어 반찬과 함께 차려 내놓음.
·그들이 마음은 여자처럼 여리다. 박연이 알려준 사실에 따르면, 청나라 군대가 침략했을 때 숲속에서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적군에게 살해당한 수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는 자살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함.”--- pp.126-127
“하지만 선교사들은 일반적인 유럽인들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기도 했다. 서양의 상인들이나 탐험가, 군인들은 유럽에서 간행된 책에 실려 있는 조선에 관한 내용만 알고 있거나, 잠시 조선을 들러서 겉으로 보이는 것들만 구경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비해서 선교사들은 처지가 사뭇 달랐다. 길게는 20년 넘게 조선에서 살면서 별별 것들을 다 목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사람의 생활에 관한 것도 무척 잘 알고 있었고, 또 조선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일이나 사회적인 일들도 비교적 소상하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 조선을 다녀간 서양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상세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 p.199
그의 제안에 따라 다양한 개화사업들이 입안·추진되었고, 이 사업들은 그의 지인들에게 불하되었다. 1883년 그와 친분이 있던 이화양행怡和洋行의 거빈스Gubbins에게 상해-인천·부산 간 월 2회의 정기항로권을 부여하고, 상무총판商務總辦 진수당陳樹棠 에게 청국에 유리한 초상국윤선왕래합약장정招商局輪船往來合約章程을 체결하여 상해-인천 간 월 1회의 정기 운항권을 부여했다. 이후 독일계 세창양행世昌洋行과 윤선임조조약輪船賃租條約을 체결하여, 정부 조세를 운송하는 권한을 허여했다. 나아가 그의 지인인 독일인 메르텐스A. Maertens를 고용하여 잠상공사蠶桑公司를 설립했고, 독쿀인 크니플러Kniffler를 초빙하여 연초 재배를 시도하였으며, 독일계 미국인 로제바움J. Rosenbaum을 고용하여 성냥, 유리, 도자기공장 등을 설립하려 했으나 그가 퇴직하자 모두 해고되었다. 이밖에도 그가 해관총세무사로 재직할 당시 총 해관원 32명 중 10명이 독일인이었다. --- p.260
“1902년 겨울 로제티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는 이 모든 숨 가쁜 변화가 일단락된 뒤였다. 그와 가리아쪼의 카메라를 기다린 것은 넓고 깨끗한 데다 전차까지 다니는 대로, 경운궁 안의 양관洋館과 그 주변의 외국 공관, 서양식 호텔과 철도역, 외국인을 위한 관광지로 개방된 옛 궁궐들, 전차를 타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외郊外 지역, 이미 서양 문물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로제티도 당대 유럽인 특유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성실하고 치밀한 기록자였기에, 이들 변화를 충실히 담을 수 있었다. 그 덕에 [꼬레아 꼬레아니]는 1902년의 대한제국은 단지 ‘망해가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동양의 전통과 서구 문화를 자기 방식으로 조화시키면서 근대화를 모색하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그 어느 저작보다 생생히 증언하는 귀중한 책이 되었다.”--- p.291
“하늘다람쥐는 베리만을 가장 기분 좋게 만든 동물이었다. 그는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에 넓은 피부막이 있는 은회색의 살아 있는 하늘다람쥐를 구입하기 위해 1935년 12월 만주와의 국경지역을 방문했을 때 마리당 10엔에 사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심지어 결혼식에 참석했던 하객과 신랑까지 나서 하늘다람쥐를 잡아왔다. 10엔은 당시 그 지역 남자의 20일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결국 베리만은 열두 마리를 구입했는데, 이듬해 스웨덴으로 돌아갈 때 두 마리를 데리고 가 1년 넘게 집에서 애완동물로 키웠다.”--- p.385
“다시 [조선고적도보]를 들여다본다. 처음에는 이렇게 많은 사진을 모아놓은 것,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그리운 눈으로 들여다본다. 그러나 건축의 공포, 결구 등 세부 사진이나, 언덕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석탑 등을 보노라면 여기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조선고적도보]의 주인공은 대부분 유적과 유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 이뤄지는 것인지도 모른 채 무덤의 흙을 파내고 있는 인부들이거나 비석 옆에 수줍게 서 있는 아이들로, 이 사람들은 유적의 크기를 알게 해주는 척도로 쓰였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고유섭이 세키노의 책을 ‘고물등록대장’ 같다고 한 까닭을 알 만하다.”--- p.360
“백인 여행자가 처음으로 한국에 체류할 경우 처음 몇 주 동안은 기분 좋은 것과는 영 거리가 멀다. 만약 그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두 가지 강력한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나는 한국인들을 죽이고 싶은 욕구이며, 또 하나는 자살하고 싶은 욕구다. 개인적으로 나라면 첫번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한국이 얼마나 엉망이었길래 살인충동까지 느끼게 되는 것일까? 기본적인 공공시설이나 장비, 물자 따위가 엉망인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했다. 서울을 떠나 북경으로 이어지는 길은 명색이 황제의 사신이 다니던 왕도王道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우스꽝스런 웅덩이의 연속이었다. 여정은 끊임없이 지체되었다. 한국에서는 장비 하나 하나가 다 문제를 일으켜서 “말이 다섯 마리면 20개의 편자가 필요하고, 20개의 편자는 20개의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에게 살인충동까지 일으킨 가장 큰 골치거리는 그런 물질적인 조건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견딜 수 없이 나약하고 게으르며 도둑질 잘하고 약자에게 강한 한국인의 심성, 또 그러면서도 불필요하게 호기심 많은 한국인들의 태도였다.”--- pp.224-225
“부산에서도 비가 강하기 오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려야 했다. 배가 태풍 때문에 떠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비가 한국의 밝은 색깔의 그림처럼 된 추억까지 말살하지는 못한다. 대한 만세! 한국이여 만년 살아라!를 이별의 인사로 이렇게 크게 외치고 싶지만, 정작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이 민족은 국가를 잃었다. 아마 그것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침묵으로 순정한 한국 사람들에게 손을 젓는다. 아마도 같은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자기 나라 지배자들의 통치 아래에서보다는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마치 한 민족을 무덤에 옮겨놓은 장례식 행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p.327
“조선풍속으로 완상된 또 다른 주제는 젖을 내놓은 여인의 모습이다. 짧은 저고리 때문에 가슴을 동여매는 천을 치마와 함께 입었던 1900년대까지, 하층민 여성들이 물동이를 한 손으로 받쳐 이거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느라 가슴이 살짝 노출되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와 사진므 찍는 외국인들은 이 모습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함흥 옥치상점에서 발행한 사진을 보자. 지붕을 얹은 공동 우물가에 물 긷고자 나온 세 명의 각기 다른 나이의 여성은 물동이를 인 채 카메라 쪽을 향해 서 있다. 맨발로 홑겹의 흰 저고리 치마를 입은 차림새를 보면 여름이다. 가운데 있는 젊은 여성은 물동이를 한 손으로 이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노출되자 다른 팔로 가슴을 가린다.”
--- pp.407-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