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로 지적된 ‘동맹회의 통일성 결여’에 대해 살펴보자. 손문도 혁명의 실패 원인을 통일성을 갖추지 못한 혁명 정당에서 찾았다. 손문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화혁명당의 영수인 자신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 조직과 사상의 통일을 이루고자 했다. 먼저 복종의 증거로 입당 시 ‘절대복종 선서’와 서약서, ‘지장 날인’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이 불거졌다. 황흥은 “손(孫) 선생에 복종하며 다시 혁명을 일으킨다”라고 서약에 쓰는 것은 한 개인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한 개인을 도와 혁명을 하는 것과 같으며, 서약에 지장을 찍는 것은 범죄인의 공소장과 같으니, 전자는 불평등하고 후자는 지나치게 모욕적이라고 지적했다. --- p.49
개혁 조치를 통해 민중에게 선전하고, 민중을 조직해 그들과 함께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도움으로 공화를 이루려는 생각이 손문에게 없었던 듯하다. 당시 중국의 상황에서 국가의 통일과 공화를 완성하려면, ‘적극 무력’ 이외에는 불가하다는 인식이 손문을 붙들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혁명파가 제국주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한 것도, 신해혁명 실패의 중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이와 관련해, 손문이 제국주의의 간섭을 1, 2차 혁명의 실패 원인으로 보고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적극 무력’으로 혁명의 단계를 거쳐 공화를 완성한다면, 제국주의 문제는 모두 해소될 것이라고 믿었다. --- p.71
손문의 혁명당은 원세개 사후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1차 혁명(무창기의) 때와 비교해보면, 무창기의 때도 손문의 역할 특히 군사적 역할은 거의 없었다. 다만 무창기의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공화혁명의 원조가 손문이었 때문에,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혁명을 계속 추진하지 못하고 원세개에게 정권을 양도했다. …… 크게 보면 손문은 세 가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은 근거지, 재정과 무력, 혁명당이었다. --- p.206
손문의「혁명방략」은 자신에게 절대복종하는 당원들로 구성된 혁명당을 조직하고, 이어 혁명군에 의해 적극 무력으로 북경정부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혁명 추진은 군정과 훈정 단계를 거쳐, 헌정을 실시함으로써 공화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를 전제로 혁명 시기인 군정기와 훈정기에 혁명당은 정식정부(혁명정부)를 수립하는데, 손문은 혁명당의 총리이자 혁명군의 대원수이며 정식정부의 대총통으로 당?군?정을 모두 장악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절대복종하는 당원, 그들로 구성된 혁명당과 혁명군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손문은 ‘적극 무력’(북벌)을 추진하려 했고, ‘정식정부’도 혁명정부가 아닌 북경에 대응한 ‘중화민국의 정식정부’였다.「혁명방략」의 왜곡이었다. --- p.296
1915년 초 일본이 ‘21개조’를 북경정부에 요구했다는 ‘비밀’이 드러나자, 특히 이에 대한 저항이 일본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손문은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해 일본의 원조를 바라고 있던 때이므로, ‘21개조’를 왜곡해 해석하며 일본을 지지했다. 그러나 혁명당 내에서도 ‘21개조’에 대응하자는 요구가 나왔고, 이어 도쿄에 거주하던 혁명파들이 21개조에 반대 성명을 내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손문의 답을 구하고자 했다. 손문은 각자 개인의 이름으로 성명을 내는 것은 허락했으나, 자신은 따로 대책이 있다면서 함께하기를 거부했다. 이리하여 이들은 손문이 아니라 황흥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물론 손문은 따로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 p.444
풍옥상의 북경정변이라는 돌발 변수로 북벌은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이제 국민정부를 건립할 기반이 없어졌다. 이에 손문은 정부 건립의 두 번째 방법으로 국민회의 개최를 제시했다. 만약 북벌에서 일정한 성과를 얻었다면 즉 지배 지역을 확보했다면, 손문은 국민회의를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제안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일전대회’의 연설에서는 두 번째 방법으로 ‘국민회의’를 제시하지 않고, “단체를 결합하게 하여 정부의 실현을 요구한다”라고 했다. 내용상 그다지 차이는 없지만, 손문에게 ‘국민회의’는 좀 뜻밖이었다. 손문의 국민회의 개최 주장은 오사 이래 민중의 힘의 분출에 영향을 받아 사상적으로 변화해 민의를 수용한 대표적 사례로 인용된다. 그러나 이보다 1년 전, 국민회의류의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질 때 손문은 의아하게도 참여하지 않았다. 의아하다는 것은 국민회의 주장이 바로 직계의 북경정부에 대한 저항운동이었고, 당시 손문은 반직을 위해 군벌과도 손잡고 동맹까지 맺고 있었기에, 직계를 성토하기에는 정치적으로도 아주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국민회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게 아니라 손문은 반대했다. --- p.822
‘손문 신화’는 손문 연구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국부’라 칭하며 흠잡을 데 없는 혁명가 혹은 ‘사상적 변화’를 거쳐 좌우에 균형 잡힌 혁명가로 평가하는 경우 등등 모두 ‘손문 신화’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역사가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신화’이다. ‘신화’는 그 형성 과정에서 단점은 빼버리고, 장점은 부풀리기 마련이다. ‘신화’는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역사’와 배치된다. 그렇다고 ‘손문 신화’를 극복하려는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구미 쪽의 사료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손문의 인식과 행동을 통해 반제를 지향했다는 손문의 허상을 밝힌 연구도 있다. --- p.871
그러나 손문은 열강을 제국주의 국가로만 보지 않았다. “외국인이 나쁜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정말로 많아” 배울 점도 있으니, 예컨대 중국의 건설에 있어 “영국의 공정한 태도, 미국의 원대한 규모, 프랑스의 애국정신, 독일의 인재와 학문, 나아가 심지어 소비에트 러시아까지도 중국의 실업 발전, 국가 건설에 족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해방 투쟁의 목표는 모두가 반제국주의일 뿐”이라는「일대선언」을 놓고 볼 때, 손문의 제국주의관을 안일하다고 비판할 수 있겠으나, 제국주의 열강을 배울 것이 있는 ‘외국’으로 보는 폭넓은 세계관이, 주저하지 않고 소련과 합작하도록 이끈 것은 아닐까. --- p.872
손문의「혁명방략」 속에서 단어를 개별적으로 꺼내 조합하여 ‘군사독재’라고 규정했다. 즉 ‘적극 무력’에서 ‘군사’, 군정과 훈정에서 ‘독재’라는 단어를 취해 이를 합쳐 ‘군사독재’라고 부른 것이다. 기실 ‘군사독재’란 헌법 체제하에서, 즉「혁명방략」에 따르면 헌정 시기에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 불법적 폭력(무력)을 동원해 인권을 탄압하고, 국민을 억압하는 체제를 말한다. 손문의 ‘적극 무력’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국민을 억압하는 ‘군사’가 아니다. --- p.874
혁명 과정 중 일정 지역을 지배한 훈정기에 주권재민의 민주제를 설정하지 않은 것을 우민관의 소이(所以)라고 한다면, 손문이 훈정을 주장하던 당시(1914)에 뉴질랜드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국가가 “태생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로 전 국민의 반을 차지하는 이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우민정치를 행하고 있었다. 1928년에 이르러서야 ‘우민’인 영국의 여성이 참정권을 얻었고, 일본의 여성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에나 참정이 가능했다. 아마 패전이 아니었으면 우민의 역사는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어느 나라가 먼저 주권재민의 민주제를 행했는가라는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주장을 훗날 ‘완성된 민주제’와 무조건적으로 비교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진시황(秦始皇)이나 한 무제(武帝)가 ‘독재자’였다고 해도, 이를 오늘날의 주권재민으로 설명할 일은 아닌 것이다. --- p.877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했다. 이제 일본의 최대 급무는 공산주의의 소련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중국을 끌어들였다. 친일의 단기서 정부가 들어서자, 일본(정부와 낭인 모두)은 손문을 버렸다. 그런 일본이 북경의 단기서 정부와 대립하고 있던 손문을 끌어들여, 남북이 함께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나서고자 획책했다. 일본을 입국 모델로 삼고 있었고, 일본 낭인들의 대아시아주의에 공감하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물질적 도움도 받았었으며, 일본의 도움을 바라고 있던 손문은 일본 낭인들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며 “본인은 공화 국체가 공고히 될 수만 있다면 정권을 포기할 수 있으며, 공화 국체가 만약 위태로워지면 공화를 유일한 생명으로 하는 본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공화를 옹호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 p.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