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풍교 입구에서 통도사 부도원(浮屠園) 입구 선자(扇子: 부채)바위까지 1.5㎞의 오솔길, 차량 통행의 방해를 받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바로 통도 팔경 중의 하나인 ‘무풍한송(舞風寒松)’ 길이다. 무풍한송, 춤출 무(舞), 바람 풍(風), 찰 한(寒), 소나무 송(松). 언제나 바람이 춤추듯이 불어오니 주변의 소나무는 늘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날씨에 이 길을 걸으면 알지 못하지만, 겨울에 이 솔숲길을 걸어본 사람은 이 말뜻을 알 수 있다. 통도천인 청류동천을 따라 부는 바람은 춤추듯 안겨오고, 솔숲길의 소나무는 늘 푸르러 따뜻함보다는 차가움으로 가슴에 다가온다. 여름날에는 그 차가움이 시원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소나무 향기가 온몸을 간질이며 감싸고, 소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은 몸을 한 바퀴 휘돌며 지나간다. 소나무가 전해주는 바람에 향기에 색깔에 취해 걸어간다. 마치 다른 세계를 걷는 것 같다. 느리게 사는 삶을 즐길 수 있다. 무풍한송의 길을 걷는 것은 축복이다.
--- p.51~52
인간의 삶에 늘 함께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나무이다. 집 짓는 건축 재료, 밥하고 군불 때는 땔감, 책을 만드는 종이, 휴식의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도 나무, 그리고 마지막 시신을 담는 관 등 여러 가지로 나무는 인간 삶의 매순간에 같이하고 있다. 나무는 한 곳에 서서 치열하게 삶을 사는 존재이다. 지상에서 산소호흡을 하는 모든 생명체 중 나무의 도움을 받지 않은 존재는 없다. 나무는 지상 생명체들의 어머니이다. 나무는 자신의 모든 것은 내놓는 존재이다. 숨을 쉬도록 할 뿐 아니라 애벌레에게는 나뭇잎을, 동물들에게는 열매를,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삶의 공간을 제공해준다.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존재가 나무이다. 인간 삶이 나무와 떨어질 수 없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 p.73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주역은 항일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통도사 독립운동 주역인 스님들은 오택언, 양대응, 김상문, 신화수 스님이고 연관자는 한용운 스님이다. 이 스님들은 항일독립운동의 길을 계속 걸었다. 1919년 11월 15일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선언 기초자는 백초월, 신상완 스님이고 선언자는 통도사 김축산(김구하), 범어사 오만광(오성월) 등 12명이었다. 1941년 통도중학교 항일 민족교육 사건이 일어나는 원천이었다. 김말복(징역 2년), 조병구(징역 2년), 신정균(불기소), 배기철 선생(불기소)이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고 양대응 스님도 고초를 겪었다. 배기철을 제외하고는 모두 통도사 출신 스님이었다. 배기철은 해방 후 조봉암, 강정택과 함께 남한의 농지개혁을 주도하였다.
--- p.180~181
1921년 5월 11일, 한 젊은이가 옥중에서 단식하여 죽었다. 생일이 며칠 남지 않은 날이었다. 그는 3대 독자로 홀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남에게 교훈이 될 멋진 말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 어떠한 기록도 그 자신이 직접 남긴 것이 없다. 집안 내력도 지극히 평범하여 내세울 것이 없다. 어쩌면 위인으로 쓸 이야기 자체가 없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박재혁(1895. 5. 17.~1921. 5. 11.)이다. 박재혁은 의열단원 최초로 의거를 성공한 독립투사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부산독립유공자 1호이다.
--- p.195
역사는 기록이지만 한편으로 사람의 일이다. 연관된 사람들의 권력에 따라 역사는 사실이지만 평가에 있어 대립과 갈등을 유발한다. 역사의 기록도 권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립운동도, 친일의 역사도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기억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혼재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역사 일부가 수치스럽다 하여 지우려는 시도가 있다. 역사를 청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을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역사 문화유산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문화유산을 제거하면 역사적 기록과 기억이 사라지게 된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대상이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왕조의, 일제의 유산이라도 그 흔적을 남겨두어야 한다. 남겨두어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존재하므로 교육이 되고 교훈이 되지만, 사라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과격하게 청산할 것은 역사 문화유산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과 생각이다. 존재하는 것이 수치임을 기억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 p.334
불교가 핍박을 받던 조선시대, 사찰에 부과된 부역의 종류만 30~40종류에 이르렀다.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심지어 빨래돌, 다듬잇돌을 비롯한 특정 공납물과 온갖 농작물은 물론 하다못해 산나물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지방의 양반들에게 세금으로 내놓고 또 수탈당했다. 그러나 양란 이후 조지서 혁파와 수취체제의 변화로 인해 승려의 종이 생산과 상납은 본격화되었다.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종이를 청나라 조공품으로 보낸 사실 또한 승려의 지역(紙役)이 가중한 원인이었다. 헌종 시대에 이르러 전국의 사찰은 국가의 지물(紙物, 종이) 생산소로 전락하거나 각종 공물의 공급처가 되었다. 사찰에 종이 만드는 부역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사찰과 승려에게 닥나무 농사를 짓고 종이를 만들어 바치라는 부역을 부과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워낙 그 폐해가 심해, 한 군이나 현에서 단 한 명의 승려도 남지 않게 되는 경우가 속출했다.
--- p.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