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의 일생에는 여성 혹은 어머니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그녀는 여자라서 약하지 않았고 어머니라서 더 강하지도 않았다.
아들의 주검을 끌어안고 자신의 죽음을 채비했던 그녀가 자손에게 남긴 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행여 의병장으로서 쓰임새를 다한 노구를 스스로 거둬 그들의 앞길을 열어 주려는 뜻은 아니었을까? (중략)
정부는 독립운동사에 끼친 기여도와 희생도에 따라 5개 등급으로 건국훈장 서훈을 책정한다. 1등급은 대한민국장, 2등급은 대통령장, 3등급은 독립장, 4등급은 애국장, 5등급은 애족장이다. 윤희순에게는 그중 최하위 등급인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전장에 나가본 적도 없는 이승만이 건국 사상 최초로 대한민국장을 스스로에게 수여한 사실을 떠올리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 pp.30~31
조선의용대 부녀 복무단장으로 이 전투에 참여한 박차정은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무관학교 교관을 지낼 만큼 사격 솜씨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거칠 것이 없는 그녀였다. 기나긴 공방전에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며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는 이 여전사는 일본군에게 제1의 표적이 되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낡은 군복은 피로 물들었다. 치명적인 총상이었다.
1944년 5월 27일, 박차정은 결국 곤륜산 전투에서 입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5년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자로 그녀의 이름을 올렸다.
박차정은 여고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수차례 옥고를 치르고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국가가 그 공로를 인정한 건 사후 50년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왜 그토록 오랜 세월 잊힌 이름으로 남았어야 했던 것일까? --- pp.36~37
8호 방 식구들은 살아온 내력도 다양했다.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은 어윤희와 함께 개성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수원 기생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던 김향화는 권애라와 동갑내기였다. 파주 만세운동의 주역 임명애는 구세군 사령과 결혼한 유부녀로, 생후 1개월 된 아이와 함께 징역을 살았다. 동료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어윤희는 감방장이 되어 큰언니 역할을 했다.
감옥의 겨울은 지독하게 추웠고 여름은 못 견디게 더웠다. 잡곡을 버무린 주먹밥 한 덩이, 소금물에 시든 배춧잎을 둥둥 띄운 국, 장아찌 두어 쪽이 한끼 식사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늘 양이 모자랐다. (중략)
얼마 지나자 이화학당 출신으로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유관순이 이곳으로 이감되었다.
“악독한 놈들이 얼마나 모질게 굴었으면…….”
유관순은 감방에 들어올 때부터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의 형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 pp.101~102
한반도에서 3.1 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조신성은 북경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덧 마흔다섯 살의 중년이 된 그녀는 김구, 안창호, 이동녕 선생 등과 더불어 항일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듬해 귀국한 그녀는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했다. 대한독립청년단은 평안남도 영원, 덕천, 맹산 일대를 중심으로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명의 단원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 또는 중형을 선고받은 이 사건을 ‘맹산 독립청년단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1922년 3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조신성은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경찰서 심문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이 따랐으나 그녀는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관련자들의 행방을 추궁하며 죽일 듯이 몰아치는 형사들에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보시오, 순사 양반. 독립운동이라 하는 것이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일이란 걸 모르고 묻는 말이요? 부모형제 간에도 하지 않을 말을 하물며 이렇게 경찰서에 갇힌 몸으로 순사에게 털어 놓을 이유가 없지 않소?”
--- p.163
1929년 약 10만 평의 토지를 처분하여 신천군 북부면 서호리에 세워진 ‘신천 농민학교’는 왕재덕의 첫 번째 결실이었다. 두 칸짜리 교실과 교무실, 24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기숙사, 아담한 규모의 사택도 함께 지었다. 건물이 완공된 후에는 수원 고등농림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출신 교사들을 초빙하여 40명의 학생들과 같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교육과 실습을 병행하도록 했다. 그녀의 나이 일흔한 살 때였다.
이듬해 ‘신천 농업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고 학생 수가 늘어나자 학교 건물을 증축해야 했다. 왕재덕은 농사실험실을 갖춘 현대식 건물을 짓기 위해 당시 돈으로 20만 원을 추가로 투자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 유일의 5년제 사립 농민학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pp.210~211
진주 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 떨쳐 일어났다. 한금화를 중심으로 5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논개의 후예답게 촉석루를 향해 만세 행진을 이어갔다. 북, 징, 꽹과리, 나팔 등 악기를 있는 대로 동원한 악대가 앞장섰다. 기생들의 붉고 푸른 치마저고리가 태극기와 어우러져 시위대는 흡사 무슨 축제를 방불하게 했다. 남녀노소 6,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기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경찰과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다. 한금화를 비롯한 기생 5~6명은 당일 현장에서, 후일 형사들에게 체포된 사람까지 합치면 총 32명이 경찰서에 끌려갔다. 기생 박금향은 동료들을 잡아가는 헌병 말꼬리를 붙잡고 만세를 부르다 총부리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 pp.235~236
1995년 ‘제주 해녀 항일운동 기념사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계기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해녀 항일운동의 세 주역에게도 대한민국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강관순, 김성오 등 혁우동맹 관련 인사 4명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김계석과 열일곱 살이었던 고차동은 해녀 항일운동 사건 이후 생사가 불분명한 채로 87년이 흘렀다. 두 분이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해녀 항일운동의 주역임에도 후손이 없고 이를 증언해 줄 생존자가 없거나 이념 문제가 결부되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아쉬움은 주요 지역 기관과 매체들을 통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년에도 김계석, 고차동의 서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인원 1만 7,000명이 항쟁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지금껏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인원은 11명뿐이다.
--- p.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