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황룡사지 서쪽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구조와 관련 유물 등을 소개하는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자리하고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이 여러 가지 이유로 당장은 복원이 어렵지만, 이런 아쉬움을 달래 주기 위해 실제 크기의 10분의 1로 축소한 모형 탑을 만들어 황룡사 역사문화관에 전시하고 있다. 모형 탑이지만 정교하게 제작되어 있어, 그 옛날 황룡사에 우뚝 서 있었을 9층 목탑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이 모형 탑을 제작하는 데에는 설계부터 제작 완성까지 약 8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처음에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드는 데 소요된 기간은 3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현재는 원형을 유추하는 데 따른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첨단 장비 등이 없던 신라 시대에 비하면 이 모형 탑을 만드는 데 소요된 시간이 훨씬 많았다는 것에 대해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 p.105∼106, 「황룡사 9층 목탑과 황룡사 역사문화관」 중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조총에 대한 성능 파악이 우선이라는 것을 곽재우는 알고 있었다. 조총은 살상력은 높지만 사정거리가 70보 정도라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의병이 사용하는 활은 장정들이 쏘면 보통 100보 이상은 거뜬히 날아간다. 그래서 왜군과의 간격을 무조건 70보 이상 유지함으로써 최초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런 것을 두고 ‘적을 알고 싸우면 백전백승이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1보는 현재의 단위로 약 120㎝ 정도이다.
‘의병’은 국가에서 징발한 정식 군인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조직한 군대로 ‘의로운 병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곽재우 생가가 있는 의령군 유곡면 세간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600여 년 된 ‘현고수’라는 느티나무가 있다. ‘현고수’는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주변에 알려 의병을 모았다. 그래서 현고수가 있는 의령 세간리는 의병의 발상지가 된다.
--- p.173∼175,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고장, 의령」 중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한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농경과 목축을 하게 되었으며, 도구로는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를 사용했다. 수렵?어로?채집을 하던 구석기에서 농경과 목축을 하는 신석기로의 경제적 생활 변화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은 ‘큰 변화’를 말한다. 신석기 혁명은 농업 분야의 큰 변화를 말하기 때문에 ‘농업 혁명’이라고 하며, 또 ‘제1차 산업 혁명’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은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 유적이다. 이 유적지가 발견되어 학술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한반도에서 신석기인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000년경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고산리 유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8000년경의 신석기 유적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신석기의 시작이 2000년이나 앞당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의 제작 시기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하면 거의 정확히 알 수 있다.
--- p.197∼199, 「선사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동삼동 조개무지」 중에서
자금성 안에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 즉,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6조와 같은 행정기구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궁궐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자금성과 비교하면 좋겠다.
한양 도성 안에 있는 궁궐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으로 이 다섯 곳이 실제로 모두 사용된 궁궐이다. 그래서 이 다섯 궁궐을 모두 합치고 종묘와 사직단까지 합친 것이 우리 궁궐의 영역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자금성은 우리 궁궐에 비해 왜소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확한 개념을 알고 나면 규모 면에서도 우리 궁궐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 시대에는 중간에 울타리가 없이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었다. 창덕궁의 규모가 후원까지 합쳐서 약 16만 7천 평이며, 창경궁이 약 6만 5천 평으로 이 둘을 합치면 약 23만 2천 평이 된다. 이것만으로도 자금성 약 22만 평보다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섯 궁궐의 면적을 모두 합치면 40만 평이 넘으며,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광화문 앞에 있었던 6조 거리까지 포함시킨다면 그야말로 자금성과는 비교 불가일 것이다.
--- p.252∼255, 「우리 궁궐 알고 나면 자금성은 왜소」 중에서
일반적으로 왕은 죽은 뒤 능호, 묘호, 시호를 얻는다. ‘능호’는 왕의 무덤 이름을 지칭하는 것으로 건원릉, 장릉, 후릉 등이다. ‘묘호’는 왕이 죽은 뒤 삼년상을 치르고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추증되는 이름으로 태조, 문종, 단종 등이다. 즉 우리가 흔히 왕의 이름처럼 사용하고 있는 칭호는 묘호이다.
묘호에도 왕의 업적이 내포되어 있지만, 일생을 평가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짓는 존칭은 ‘시호’이다. 왕의 시호는 중국과 조선에서 부여한다. 그래서 왕이 죽은 뒤 얻는 이름은 묘호+시호(중국)+시호(조선)로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예로 세종대왕의 정식명칭은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다. 세종은 묘호이며, 장헌은 중국에서 부여한 시호이다.
또 시호는 국가나 왕실을 위해 큰 공을 세운 공신에게 임금이 내릴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순신의 시호는 충무공이며, 조선에서 충무공 시호를 부여받은 사람은 모두 9명이다. 따라서 ‘충무공’은 이순신에게만 내려진 시호가 아니라 무관들에게 부여된 시호이다.
--- p.277, 「구리 동구릉과 영월 장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