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국 내 러일 군대의 주력 동선이 인천-서울-평양-정주-의주-압록강-만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일본군의 만주 진출 이후 평안도 지역의 전투는 소규모 게릴라전을 제하면 큰 내용이 없었다. 만주 방면의 주요 전투는 1904년 2월 일본군의 뤼순 항 기습, 5월의 난산南山전투, 8월의 랴오양전투, 10월의 샤허沙河전투와 1905년 1월의 뤼순공방전, 3월의 펑톈(심양)대회전 등으로, 이후 큰 전투는 없었다. 사할린전투도 이미 1905년 7월 7일 남사할린에 상륙한 일본군 13사단이 24일 북사할린에 상륙하여 같은 날 31일 러시아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종결되었다. 반면 러일전쟁 초기부터 시작되어 일본군의 압록강 도하 이후에도 육해전으로 이어지던 함경도 지역의 전투는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종전이 공식화된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일정 기간 지속되었다.
함경도 지역 전투는 한국과 러시아의 국경선 및 동해에 접해 전개된 전투였다. 한편 이 전투의 승패 여부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일본군의 자국 영토로의 진입이 우려됨은 물론 정반대로 일본 본토 진입 계획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일본 입장에서도 이 지역이 일본과 가장 근접한 전장지였는데,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한 러시아 함대의 일본 영토에 대한 잦은 침입이 우려됨과 동시에 만주전투와는 별개로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와 사할린, 나아가 시베리아 진출에 대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었다.
---「제1부 대한제국을 둘러싼 러일의 대립과 전쟁」중에서
의주군수 남치원은 2월 16일 러시아군의 압록강 도강 이후 양초우마粮草牛馬의 응접과 도시와 시골[城村] 인민이 뿔뿔이 도망쳐 흩어지는 것이 나날이 더욱 심해서 한없이 물건을 보냄에도 그들의 구하는 것은 끝이 없고 주민의 피난으로 읍내는 ‘모든 집이 텅 비어버린(十室十空)’ 형세라면서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다.
바야흐로 지금 경작기에 임해 (農牛를) 아라사인이 매일 도살하여 가격을 지불하지 않는 것이 태반이오니 백성이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려도 어느 곳에 호소할 것이며, 둔병屯兵 내왕이 불과 1달에 도시[城底]는 십실십공十室十空하여 노인과 아이가 서로 손을 잡고 이끌고 너른 들로 끊임없이 울면서 도로에서 방황하는 정황을 차마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으며, 연로 좌우 10리 정도에 사람과 연기가 희소하옵고 …
---「제2부 전쟁과 동원」중에서
이중하는 그로부터 보름 후의 보고에서도, 일본군이 군량·마량·군용 각 종과 운수의 인부·우마를 민호에 분배하여 민정의 곤란은 대로와 벽읍이 모두 같고, 징수물품을 배정하고 사역使役으로 몰아세우고 압박하는 데 두서가 없어 관리와 백성이 의지할 길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순안·안주·용강·양덕 등은 관청이 비어 거의 무읍無邑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군수는 쓸쓸히 마을[村閭]에 있고 이서와 하인[吏隸]은 흩어지고 여행자[行旅]는 일본군의 조사와 수색으로 인해 스스로 발걸음을 끊고 청년들[丁壯]은 물자를 나른다는 연유로 모두 업을 잃고 절도竊盜가 제멋대로 행해진다면서 그 ‘처참함은 차마 볼 수 없다’는 사정을 전하였다. 미국인 종군기자 잭 런던Jack London도 평양을 지나 압록강 대안 중국 안둥과 펑황청까지 가는 길에서 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북쪽 지방은 일본군이 통과할 때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도시와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논과 들은 버려져 있었다. 김을 매지도 않았고 파종도 하지 않았으며 이 들에는 녹색 식물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 거의 모든 마을에서 종류를 막론하고 단 한 톨의 곡식도 구할 수 없었지만 …
---「제2부 전쟁과 동원」중에서
군사적 제국주의의 경제적 실현의 대표적 사례가 삼림이권 쟁탈전으로, 국가-관료 주도 형태는 러시아와 일본 모두의 공통분모였다. 그러나 러일 간의 국제전이 변수로 작용하였고,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군사외적 참여로 러일전쟁 이전에 양국 군대가 자국 정부의 경제침략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국 국경 연안의 삼림채벌권을 둘러싼 러시아 정부와 일본 정부의 이권 싸움에서 러일전쟁 이전까지 민간기업은 장치와 형식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삼림개발계획의 실제 추진단계에 가면 먼저 러시아 참모부가 개입하였고, 일본 또한 군부와 외교 당국의 입장을 전면화할 수 없었던 현실적 상황에서 참모본부 주도의 경제공작, 외무성과 위장대리인을 통한 대외 이슈화에 주력하였다.
---「제3부 러일전쟁의 경제적 배경과 결과」중에서
1909년 9~10월의 이른바 ‘남한대토벌 작전’이 전개될 즈음에는 전국의 각급 경찰서는 의병밀고를 장려하고 있었다. 전남경찰부에서는 각급 면민에게 의병 잠복자를 밀고할 것을 장려하는 한편, 직접 그 요령을 보여주고 의병들에게는 자수를 권유하였다. 경남경찰부는 경찰 단독 혹은 헌병수비대와 연합하여 토벌하는 한편, 밀정을 활용하여 조사와 체포에 노력하거나 의병에 가담한 사람들의 가택 및 가족상태 등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의병이 활동하는 지방을 정찰케 하는 등의 각종 방법을 동원하였다. 평남경찰부에서는 자위단 및 면?동장 등을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황해도 경찰부장 역시 의병 정찰과 토벌에 밀정을 사용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주간 행동을 피하고 백성들의 집 혹은 산속에 숨어서 야간에만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충남경찰부장은 경찰관으로 하여금 헌병수비대와 서로 기맥을 통해 야경, 변장, 기타 밀정을 놓는 등 의병의 수사검거에 극력 노력하고 한편으로는 민적조사民籍調査를 이용하여 ‘불량의 무리’의 출입행동을 사찰시켰다. 나아가 부락이 단결하여 이를 방어하고자 하는 등 지방민들로 하여금 ‘자위적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일제 당국도 경찰과 헌병대의 연합토벌에 밀정을 동원한 정찰 수색은 큰 효과를 보았고, 그 결과 의병이 감소되었던 것으로 평가하였다.
---「제4부 가중되는 탄압과 저항」중에서
러일전쟁과 일본의 침략 강화는 한국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요소로 작용함을 당시의 대다수 사람들이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계급적 처지와 현실적 입장에 따라 대응하는 양상이 제각기 달랐다. 대한제국 정부와 황실은 수세적 입장에서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고, 일부 개화인사들은 ‘황인종연대론’을 제시하였다. 심지어 극단적 개화지상주의자들은 오히려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기회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대체로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의 전쟁 승리를 환영하였다. 한편 ‘을사조약’으로 인한 외교권 박탈 이후 국권 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전혀 가지지 못했던 일부 인사들은 스스로 ‘절명’의 길을 선택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방법으로는 위기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결국 시대적 위기의식과 모순을 극복하려는 논리와 힘은 특히 일제 지배에 강하게 저항한 일반민중과 의병참여자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4부 가중되는 탄압과 저항」중에서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보면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 이후 논의의 추이는 ‘삼국제휴론’에서 점차 ‘동양평화론’으로 이전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동양평화’와 관련해 한국 측의 연구는 안중근의 유작 「동양평화론」의 동양 공동체론과 공판기록을 중심으로 한 분석이 대세이다. 그렇지만 동시대에 전개된 다양한 논의들이 사상되었고, 원론적 내용 이상의 비교 분석적 정리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동양평화론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이 대립하고 있고, 삼국공영론·삼국동맹론에서 발전한 동양평화론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자주적 논리로 발전, 정착하였다고 보는 견해와 18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아시아연대론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양립하고 있다.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현실을 반영한 정치언어이자 현실로부터 유리된 허구로 보면서도 한국의 동양평화론은 일본 동양평화론의 대항담론으로 형성되었다고 이해하거나, 대한제국 시기 정치세력의 행위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동양평화’란 수사를 활용한 것이라는 논의도 제기되었다.
---「제5부 인식론과 논의의 지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