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악은 1925년(을축년) 음력 12월 10일,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서하리에서 태어났다. 양력으로 1926년 1월 23일이다. 본인이 평생 음력으로 기억하고 증언한 탓으로 출생 년도와 날짜를 음력에 맞추어 기록한 사례가 많다. 또 회갑 등 나이 계산에 혼선이 많이 생겼다.
김수악(金壽岳)의 본명은 김순녀(金順女)이다. 호적에 순녀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명이 길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이름이 수악으로 바뀌어 어렸을 때부터 수악으로 불렸다. 어릴 때는 ‘여란(麗蘭)’이란 이름을 갖기도 했으며, 애란이라는 발음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 재주가 있고 영리하다고 해서 할머니나 고모들은 ‘영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자랐지만, 훗날 김수악으로 굳어졌다. 본명을 아는 사람들은 수악을 예명으로 알지만, 실제는 아명이다. 명인 김수악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호 춘당(春堂)을 즐겨 부른다.
김수악의 아버지 김종옥(金鍾玉, 1895~1956)은 여러 머슴을 두고 농사짓는 부농이었다. 선대에 충청북도 영동에서 경상도로 이주하여 함양 안의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어머니 유몽길(劉夢吉, 1899~?)은 전남 구례 사람으로 음식 잘하고 집안일 열심히 하는 전형적 여성이었다. 1915년, 김종옥 20살, 유몽길 16살 때 둘이 결혼하여 다섯 딸을 두었다. 김수악은 그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김수악의 언니 김금향(金錦香, 1921~1979)은 뒤늦게 음악을 하였을 뿐, 다른 형제들은 음악을 하지 않았다. 김취란으로 알려진 언니는 가야금산조의 명인 강태홍, 박상근에게서 가야금을, 거문고산조의 명인 한갑득에게서 거문고를 배워서 가야금과 거문고의 뛰어난 연주자가 되었다. 거문고산조를 아주 잘 탄다고 한갑득의 극찬을 받을 정도였다. 김수악도 언니가 오래 살았으면 무형문화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였다.
김수악 자매의 음악 재능은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풍류객으로 가야금, 대금, 해금 등 기악을 즐겼다. 머리에 관을 쓰고 생활하며 전통적 관습을 지키는 할아버지는 아들의 이런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김수악은 기억한다.
김종옥의 풍류는 동생 김종기(金宗基, 1902~1940)의 예술가적 삶과 맞닿아있다. 김종기는 전북제 가야금산조의 명인 박한용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웠고, 거문고산조를 최초로 연주한 백낙준으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 그는 거문고산조, 가야금병창, 판소리, 해금, 북에 두루 능한 만능 예술가였다. 진주권번에서 가야금 사범으로 가르쳤고, 서울 등지에서 여러 단체의 공연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악기 연주와 교육 활동에 활발하던 그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른 죽음에 많은 사람이 애도하였다. 소리판의 초능력자라고 평가되는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 절친이었던 김종기의 단명을 안타까워하며 남긴 노래의 음반이 국악음반박물관에 남아있다.
김수악은 다섯 살 때 진주로 이사 왔다. 함양 안의에서 150리 떨어진 진주는 서부 경남에서 가장 큰 도읍이었다. 김수악은 어린 나이에 이사 온 탓으로 출생지 함양 안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고, 오히려 진주를 평생 고향으로 알고 살았다.
김수악 가족이 진주로 이주하게 된 이유는 불분명하다. 김종옥은 안의에서 부농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진주라는 대처로 나가 살고 싶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주는 695년 통일신라 시대에 9주 가운데 하나인 청주라는 지방행정의 주도였다. 청주는 995년에 진주로 개칭되었고, 그 뒤에도 계속 서부 경남의 지방행정 중심지였다.
---「1. 1. 출생과 성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