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사천왕사왔소(四天王寺왔소, 이하 왔소)’축제는 재일동포가 한국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창설한 축제이다. 왔소는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渡來人)들의 발자취를 재현한 역사한류 축제다. 과거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 7개국(백제, 신라, 고구려, 가야, 발해, 탐라, 조선)의 사절단이 일본에 상륙하는 광경을 재현하는 축제다. 일본 왕실에 한반도 도래인들이 다수 있었단 사실을 감안하면, 고향사람들끼리 상봉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세리모니다.
이런 형태의 축제는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 어느덧 왔소는 1990년 첫 대회 이래 30년의 세월을 지내왔다. 하지만 이 축제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거기 등장하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한일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제부터 ‘왔소’의 초석을 만든 사람들 이야기, ‘왔소’가 품고 있는 탄생의 히스토리를 만나러 가보자.
고대일본의 영빈관 「사천왕사」
매년 11월 첫째 주 일요일, 오사카의 나니와궁터(難波宮跡)에는 약 5만 명의 인파가 몰려든다. 나니와궁은 천황이 살던 고대궁전으로서, 오사카가 일본의 옛 수도였음을 증명해주는 사적이다. 약 1400년 전 일본최초의 행정개혁인 다이카개신(大化改新, 646년 천황중심의 율령국가 성립을 선언한 혁명)이 선언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나니와궁의 정전 대극전은 외국사절들을 영접하는 장소였다. 지금도 그 터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살던 오사카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대 일본인들이 맞이한 해외사절 중 다수는 현해탄을 건너온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신라 무열왕 김춘추도 있었다. ‘삼국사기’ 등 한국의 사서에는 그 기록이 없기에 「아마도」라는 단서가 붙지만,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김춘추의 방일 소식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단지 647년도에 왔다고 기술한 데 그치지 않고, “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착하고 담소를 잘했다(春秋美姿顔善談笑, 일본서기 孝?天皇48편)”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의 주역 김춘추가 임금으로 등극하기 전에 일본에 다녀갔으리라.
지금의 왔소는 바로 이 나니와궁이 있던 터에서 열리고 있다. 하지만 최초의 왔소는 다른 곳에서 열렸다. 여기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사천왕사(四天王寺)다. 고대 오사카를 칭하는 나니와노즈(なにわの津)의 영빈관이자, 고대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창건한 불교사찰이다.
이승재의 뉴욕쇼크
‘왔소’는 재일동포금융기관인 ‘오사카흥은(훗날 간사이흥은)’이 시작했다. 설립 리더는 흥은의 이희건(李熙健) 이사장과 그의 장남 이승재(李勝載) 부회장이었다.
이노쿠마 카네가쓰(猪熊兼勝) 오사카왔소문화교류협회 이사장은 “이희건 씨의 머릿속에는 「모국과 사회인으로 키워준 일본」에 대한 보은과 미래를 전망한 행사를 기획한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흥은 직원 김기홍(金基弘) 씨는 “누가 뭐래도 일등공신은 이승재 씨였다”며 “그가 기획부터 조사, 완성에 이르기까지 총괄프로듀서 역을 맡았다”고 말했다. 이승재 부회장이 왔소를 기획한 동기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그건 1987년 어느 날 뉴욕 출장길이었다.
“그날 5번가를 나가려 했는데 경찰들이 갑자기 통행금지를 시켰습니다. 잠시 후 뉴욕대로 한복판에 엄청난 행렬이 등장했습니다. 그린셔츠, 그린모자를 입은 사람들이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등 여러 가지 액션을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성패트릭데이’(3.17 St. Patrick’s Day) 행렬이었던 겁니다.”
이 부회장은 이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외국계 소수자들의 축제를 위해 권위적이기로 유명한 미국 경찰이 수 시간 동안이나 뉴욕 한복판 거리를 내어주고, 심지어 친절하게 교통통제 서비스까지 해주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바로 이거다’며 무릎을 쳤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좀체 없습니다.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들이 모이는 찬스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왜 ‘왔소’라 이름 붙였나
왔소를 알려면, 먼저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흥은의 부회장 이승재 씨의 뉴욕방문에 앞선 1985년도로 거슬러 가보자. 그때는 오사카흥은 창업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당시 흥은은 독특한 목표를 설정했다. 첫째 다가오는 1990년대에는 재일동포사회를 일본사회와 대등한 관계로 만들자는 것. 둘째 재일동포 의식을 고양해 한국인들도 평균적인 일본인 이상의 수준으로 도달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왔소의 실무기획자였던 최박문(崔博文) 씨는 말한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인들의 한국관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 재일동포라 하면 한 수 아래로 얕보던 시선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지요. 그 시점에서의 ‘왔소’는 새로운 재일동포 만들기랄까, 일종의 의식개조운동이었습니다. 밖으로는 오사카의 국제화를 촉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 면에서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이벤트였습니다.”
‘왔소가 곧 자기인생’이라 자부하는 이수명(李秀明) SBJ은행 조사역은 그 목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재일동포들이 용기를 갖고 일본 땅에서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것. 자기정체성에 자신감이 없는 동포들에게 자기뿌리가 무엇인지 각성시키겠다는 것. 한반도에서 건너온 고대 도래인들이 일본이란 나라의 기틀을 만들었잖아요. 현재의 자이니치(在日, 재일동포)가 그들과 이어지고 있는 후손이란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단 것이었습니다.”
한일교류사를 재현함으로써 재일동포에게는 열등의식의 극복, 일본인에게는 한국에 대한 편견을 깨보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이 조사역은 추진단계인 1989년에 서울의 ‘신한종합연구소’로 파견된 흥은 직원, 오랜 기간 왔소 사무를 도맡아했던 실무자였다. 왔소의 실질적인 준비는 1988~90년도에 이뤄졌다. 한일고대사를 퍼레이드로 재현하는 축제의 그림이 만들어지던 시기다.
축제를 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유력하게 물망에 오른 이름은 ‘고대축제’, 일본말로 ‘고다이마쓰리’였다. 사천왕사에서 열리니까 ‘사천왕사축제’로 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이승재 부회장은 이런 이름들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학시절 한국에서 친척이 우리 집에 도착하면, 어른들이 ‘왔소’라고 인사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지요. 600~700년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상인들이 오사카 신라교(新羅橋, 현재의 신사이바시)에서 장사할 때 ‘여기 오이소’, ‘왔소’라고 말을 걸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사카에는 삼국시대 나라이름이 붙은 다리가 모두 있다. 고구려 상인들이 모였던 고라이바시(高麗橋, 고려=고구려), 백제인들이 모여 살던 구다라오오하시(百濟大橋), 옛날 신라교(新羅橋)라 불렸던 신사이바시. 이들 다리는 오사카에 남아있는 한반도 도래인들의 뚜렷한 흔적이다.
그래서 축제이름은 ‘왔소’로 확정됐다. 탁월한 선정이었다. 두 글자 속에 한민족의 정체성을 응축한 동시에, 일본 마쓰리의 구령소리 ‘왔쇼이(わっしょい)’와도 닮았다. 도래인들의 영빈관인 사천왕사와 우리말 왔소를 조합해, 축제의 공식명칭은 ‘사천왕사왔소’가 됐다.
오사카흥은 기획자들은 왔소를 단지 축제이름으로만 쓰지 않았다. 왔소를 구령으로 만들었다. 그 속에는 한국전통의 가락과 억양을 담았다.
“왔~소, 왔~소!”
그 구령은 듣다 보면 절로 따라 부르게 되는 강한 흡인력까지 갖췄다. 일본인들이 “왔~소, 왔~소!”를 외치며 행진하는 걸 보면 왠지 신기하다는 기분이 든다.
---「재일동포가 만든 30년 전통의 역사한류 축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