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을 말한다. 그러나 실상에서는 원칙이 일관되게 지켜지지 않아 이현령비현령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이를 제정한 자들이 앞장서서 원칙을 어기고 따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태종도 개국 초 험난한 역경을 겪은 후 왕이 되자마자 우선 확고한 왕위 승계 원칙의 필요성을 느끼고 새로운 원칙을 만들었고 이 원칙이 조선 시대 왕위 승계의 영원한 초석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태종은 한 세대도 지나지 못하고 본인 자신이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조선 시대 아들이 적장자로 태어나면 원자가 되고, 7∼9세쯤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을 거쳐 왕으로 등극하는 것이 승계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이런 조건들을 갖추고도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이 더 많았다. 오히려 장남이 아닌 차자나 서자가 왕으로 등극한 경우가 더 많았다.
첫 번째, 왕이 될 수 있는 필수 요건을 갖추지 않고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자력으로 왕이 된 경우가 있다.
그 예를 보면 방원(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었지만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력으로 왕에 올랐고, 세조는 세종의 차남이었지만 어린 조카인 단종을 내몰아 왕이 되었고, 서자 출신인 인조는 반정에 참여해 왕이 되었다.
두 번째, 불리한 여건 속에서 왕이 되리라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는데 “나랏님은 하늘이 내린다.’는 옛 말처럼 갑작스레 타의에 의해서 왕이 된 경우이다. 예를 들면 성종, 중종, 철종과 고종 등이 이에 해당된다.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도 왕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왕이 되지 못한 왕자, 특히 똑똑한 왕자일수록 그들의 삶은 험난하였다. 정쟁이나 음모에 휩쓸려 유배 가는 것은 예사였고, 한창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치거나 바보처럼 살면서 일생을 마쳐야만 했다.
조선 왕자들의 죽음의 원인을 보면 왕이나 왕비들에 비해서 특이한 점이 있다. 즉 2세 이전 사망하는 영아기 사망이 많았고, 정쟁에 휘말려 희생되어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한 왕자가 많다는 점이다.
조선 왕 27명의 평균 수명은 47세(17~83세)이고, 왕비 42명의 평균 수명은 49.5세(16~82세)이다. 반면 조선 왕자들의 평균 수명은 매우 짧아, 왕자들의 수명 중앙값은 28세이고, 영아 사망자와 생몰년이 미상인 경우를 제외한 124명의 왕자들의 평균 수명은 약 39세(3~91세)이다.
조선 왕자들의 연령별 사망률을 보면 2세 미만의 신생아 및 영아 사망자 수는 45명으로 4명 중 1명 꼴로 조졸하여 제일 많았고, 그 다음으로 31∼40세 사이가 28명으로, 한창 나이에 사망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정란이나 반정 등 정쟁 싸움에 휘말려 죽음을 당한 왕자들은 29명으로, 6명 중 1명 꼴로 정쟁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정쟁으로 희생된 대표적인 몇 예를 보면 태조의 7남 방번과 8남 방석은 이복형인 방원(태종)과 왕권 다툼을 벌였으나 1차 왕자의 난에 패해 궁궐을 나서자마자 살해되었다.
정종의 서장자인 불노를 정종이 즉위한 후 원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종은 동생 방원의 후환이 두려워 불노는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내쫓아버려 그 후 불노는 중이 되어 객지를 떠돌다 횡사하였다. 또한 정종은 그의 시비 기매 사이에 태어난 지운도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내쫓았다. 이후 지운도 중이 되어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정종의 아들이라고 떠벌이자 세종 때 난언죄로 처형을 당했다.
세종의 적3남 안평대군, 적6남 금성대군, 혜빈 양씨(단종을 양육)의 장남 한남군, 3남 영풍군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연산군의 네아들 즉 세자 황, 창녕대군, 양평군, 이돈수는 10세 미만의 어린애들이었지만 중종반정 후 후환을 두려워한 반정공신들에 의해 유배지로 보내져 사사되었다.
정란이나 음모 등에 연류되어 죽은 왕자들의 처형 방식을 보면 사사
(사약) 9명, 살해 7명, 자결 3명, 교살 2명, 이외 방에 가두고 불을 지펴 타죽게 하는 증살, 뒤주 속에 갇혀 탈진에 의한 죽음, 독살, 유배 중 전염병에 걸려 죽는 등 왕자들의 사인은 다양하며 그 비참함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이런 끔찍한 참사를 예측한 일부 왕자들은 거짓으로 못난 체, 바보 같이, 활량처럼 가식적으로 살아 위험을 모면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예조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부왕인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왕위를 잇지 못하자 일생동안 바보처럼 살아 그의 여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그 당시 똑똑한 왕손인 이하전이 살해되자 난봉꾼 행세를 하면서 살다가 기회를 얻자 신정왕후(효명세자 부인)와 결탁하여 자신의 차남(고종)을 왕으로 등극시킨 일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극을 인지한 왕비나 후궁들은 자기 자식을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치열한 싸움을 하여야만 했다.
조선 시대 궁궐 내에서의 왕비와 왕자들의 생활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호사다마(好事多魔)” “겉좋은 개살구”격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왕실 내의 왕비와 왕자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사람이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지를 깨닫는다.
끝으로 나의 원고를 교정하고 틀을 잡아 한 권의 책으로 탈바꿈해 주신 메디안북 출판사 김용덕 사장님과 출판사 관계자에게 깊은 사의를 표한다.
또한 나의 동반자 노경희 여사에게 무한한 애정을 표한다. 일상에서 나의 잘못된 언행이나 버릇, 단점을 적시적소에 지적해 주어 내가 그릇됨이 없이 바른 길로 가게 해주니 그녀는 나에게 인생의 나침반 같은 존재이다. 아울러 최근에는 나와 함께 조선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저자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내용이나 오류도 지적, 교정해 주는 등 언제나 곁에서 나를 부축해 용기를 돋아주는 믿음직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
인생 행로에 아름다운 동행자가 있어 나로 하여금 행복과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용해원 시인의 “동행”이란 시로 끝을 맺으려 한다.
『인생길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힘들 때 서로 기댈 수 있고
아플 때 곁에 있어줄 수 있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줄 수 있으니
서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도
홀로면 고독할 터인데
서로의 눈 맞추어 웃으며
동행하는 이 있으니
참으로 기뿐 일입니다 - 중략 -
그 사랑으로 인하여
오늘도 내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2017년 정초 청목 최일생
---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