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멸시하고 일본의 방파제로 간주한 채 ‘유도’, ‘탈아’, ‘협박’을 정당화하는 후쿠자와의 논리는 후쿠자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메이지 시대 일본이 꾀한 조선정책의 기본 구상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청일전쟁 당시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1844~1897년)는 “조선반도는 언제나 붕당 간의 다툼이나 내분·폭동이 잦은 곳으로, 사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독립국답게 책임을 다하려는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확신’에 서서 “이를 광구(匡救)하려 도모하지 않는 것은 이웃 나라의 우의에 반할 뿐 아니라 실로 우리나라 자위의 길에서도 어긋남이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인즉, 일본정부는 조선국의 안녕을 꾀하는 계획을 담당하는 데 추호도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썼다. --- pp.21-22
조선에서 발행되던 조선총독부의 어용신문 ≪경성일보(京城日報)≫는 1919년 3월 7일 “이른바 독립운동”이라는 사설에서 3·1운동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첫째, 3·1운동이 “열강의 동정을 얻으려”는 것으로 이는 “가공적 몽상”이라는 점. 둘째, 3·1운동이 공약 3장에 “질서의 존중”을 내걸면서도 실제로는 “폭행을 일삼는 자가 도처에 있다는” 점, 셋째, “이른바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불령(不逞, 일제는 항일 독립운동가를 이렇게 부름-역자)의 무리가 헛된 미명 아래 많은 사람을 현혹해 부정한 이득을 도모하려 한 것”이라는 점, 넷째, 조선은 그 역사에 비춰 독립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했다. ≪경성일보≫의 3·1운동관은 어용신문이 3·1운동을 어떻게 봤는가를 나타낼 뿐 아니라 이른바 조선통이라는 자들이 3·1운동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고, 그것을 일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하려 했는가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 pp.53-54
한국 문화사가인 재일 한국인 김양기가 야나기의 조선관·조선예술관을 비판했다. 그는 [한국의 석불]에서 “한국의 백(白)은 상복(喪服)이나 애수의 백이 아니라 밝고 선연한 불꽃으로 타는 태양의 백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야나기의 조선미술론에서 비롯된 잘못을 고찰하면서, 야나기는 “민중의 낙천성과 생명력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것은 언어를 해석하지 못하는 외부인의 한계이기도 했다”라고 기술했다. --- p.94
조선인이나 조선문화를 열등시하는 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호소이는 위의 인용 외에도 여러 예를 들어 조선인과 조선문화를 멸시했다. “조선 부인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아무 권한이 없고 또 인격을 무시당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음란한 즐거움으로써 생활의 전부를 보상받으려 한다.” “언문(조선의 고유문자)은 현대로서는 시대의 진운에 맞지 않는 망국적인 문자일 뿐 아니라 앞으로 다망한 세계에서 과연 실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고할 필요가 있다.” --- p.198
1965년 1월 7일에 제7차 한일회담의 일본 측 수석대표 다카쓰기 신이치(高杉晋一)는 외무성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조선에 대한 과거 식민지 통치에 대해 일본이 사과하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으로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분명히 조선을 지배했다.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을 하려고, 조선을 좀 더 낫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 p.중략) 일본의 노력은 결국 전쟁으로 좌절되고 말았지만 20년 정도 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 p.232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주된 망언이 ①“병합조약은 합의에 의해 체결됐다”, ②“조선에서 좋은 일도 했다”, ③“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라는 세 가지임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일본정부는 1995년에 이르러 겨우 ①에 대해 부정했다. 그러나 ②와 ③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이 바로 에토 망언 등이 이어지는 토양이다. 그리고 새로 나온 오자와 망언은 이들 망언을 망언으로 인식할 수 없는 정치가가 지금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망언이 망언인 이유를 분명히 하는 역사연구를 계속함으로써 그 성과를 국민 일반의 역사인식으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역사교육이 필요하다. --- p.287
전전(戰前), 일본의 조선사학계에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세 가지 사관이 지배적이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선조가 같다고 하는 ‘일선동조론’, 조선사회는 뒤떨어져 있었다는 ‘조선정체성론’, 조선은 옛날부터 일본이나 중국에 복속하고 있었다는 ‘조선부용(附庸)론’이다. 전후 일본과 남북한의 역사학이 발전한 결과, 이 중 어느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중략) 1982년에 역사교과서 사건 이래, 위의 조선사관 세 가지를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일본·한국·중국의 역사적 관련성을 좀 더 자세하고 바르게 쓴 교과서나 한일 공통교재를 만들려는 운동이 계속되어왔다. 그 결과 도쿄서적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견본 판(이하 도쿄서적 판)을 읽어보면 과거 조선사관이나 망언은 거의 사라졌다. 후소샤가 출판해 이번 검정에 합격한 2002년도 중학교 역사교과서(이하 후소샤 판)는 이러한 최근의 움직임에 대한 반동이다. 전전 조선사관을 학문적인 뒷받침도 없이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 pp.288-289
후지사와는 한일 간의 역사대화가 곤란한 이유로 조직운영문제, 자금난, 이문화 교류의 어려움, 한국 측 역사학의 평균수준문제 네 가지를 든다. ‘한국 측 역사학의 평균수준문제’는 오해를 초래하기 쉬운 표현이다. 이는 후지사와가 “침략전쟁 때나 식민지 시대에도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일본인은 소수라고 해도 존재한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한국 측이 납득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다. --- p.304
전후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사죄하기보다는 오히려 망언으로 대응해 한일관계는 망언의 연장 속에서 전개됐다. 전후 일본 지도자의 망언은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일제의 조선 ‘진출’ 긍정론이다. 이는 1876년 이래 이뤄진 일련의 조선 침탈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며, 러시아·중국 등 여타 열강의 지배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한국병합 합법론이다. 1905년 이후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과정을 명문화한 일련의 구조약이 합법적이고 원만하게 체결된 것으로 정당하고 유효하다는 것이다. 셋째, 식민통치 긍정평가론이다. 일제의 조선 통치가 기본적으로 조선인에게 유익했으며, 조선 근대화에 기여한 바가 많다는 입장이다. 일본의 망언은 우발적인 실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의 뿌리 깊은 역사인식이 표출된 것이다. 일본인 대다수는 한국병합조약이 합법적이고 유효하게 체결됐으며,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민족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 pp.317-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