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가 본격적으로 세계적 조명을 받게 된 계기는 2000년대 초반 롤플레잉 게임을 기반으로 한 사이먼 웨스트 감독의 포스트모던 어드벤처 영화인 〈툼 레이더(Lara Croft: Tomb Raider)〉(2001)의 촬영이 이뤄지고 난 이후였다. 영화는 고고학이라는 서구적 렌즈를 통해 아시아의 미지 세계 탐구라는, 〈인디아나 존스: 마궁의 사원(Indiana Jones and the Temple of Doom)〉(1984)의 세계관과 동일한 활극적 오리엔탈리즘의 전유를 통한 구원 서사 체계 안에서 캄보디아라는 원시성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축축하고 습기 찬 소멸 직전의 원초적인 모성적 공간으로 타자화된 캄보디아의 정글과 컴퓨터 그래픽처럼 정교하게 하이퍼섹슈얼화된 여성 히로인 라라 크로프트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전 세계 많은 관광객들을 시엠립으로 불러들이기에 충분한 기이하고도 매력적인 병치를 이끌어냈다. 캄보디아 정부는 영화의 성공에 발 빠르게 대응해 당시 제대로 된 국제공항도 고속도로도 없던 시엠립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2세기에 지어진 ‘미지의 세계’ 앙코르와트는 이제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부응해 관광 인프라 개발을 통해 캄보디아의 문화관광 국책 사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던 아케익의 스펙터클로 ‘상상’된 원시성의 캄보디아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낙후된 ‘현실’의 캄보디아를 구원한 것이다.
--- p.21~22, 「이용우, 침묵하던 목소리들의 귀환」 중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베트남 각지에 세워진 GI 라디오 전파 신호를 통해서 국경을 넘어 흘러들어 온 60년대 미국 팝의 영향력이다.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은 라디오를 통해 비틀즈와 비지스 등 영미의 로큰롤에 노출되었고 이를 캄보디아의 로컬 신(scene)과 조율하려는 음악인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후반 미소 우주 전쟁과 베트남 전쟁으로 촉발된 사회문화적 불안으로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며 물질문명을 부정하던 서구 히피 세대의 로큰롤은 반전운동과 청년문화를 주도했고,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미국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적 가치관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대중음악의 전 지구적 조류들은 1960년대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동차, 텔레비전, 라디오와 음반산업의 구조 개편이라는, 미디어를 통한 물질적 토대와 대중문화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 p.24, 「이용우, 침묵하던 목소리들의 귀환」 중에서
아도르노는 녹음된 음악이 진정한 의미에서 ‘글쓰기’에 가깝다고 믿었다. 그래머폰 레코드에 각인된 다양한 의미들, 그리고 이것을 ‘청취’한다는 행위는 다분히 청각이라는 개별적 감각을 뛰어넘어 우리가 현재에서 과거를 생생하게 재현해낸다는 일종의 타임슬립으로서의 공감각이다. 잃어버린 아카이브가 촉발하는 음악으로 매개된 감정의 파동들, 소실되어 사라진 역사적 파국이 레코드의 홈을 따라 유령처럼 서서히 재래하는 순간들, 전통과 혼종의 문화적 접변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근대성의 조건들은 단지 고립되고 분리되며 변형된 아카이브의 기록이라는 추상적 기록의 메커니즘에 포섭되지 않고, 감각을 응집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재정의하며 청취의 테크놀로지 안에 각인된 어떤 ‘문화적 정신 상태’를 해방시키는 현재진행형의 청각적 현대를 구현해내고 있다.
--- p.35, 「이용우, 침묵하던 목소리들의 귀환」 중에서
끔찍한 역사의 한가운데에서도 집단 기억은 끈질기게 사람들을 뭉치게끔 한다. 캄보디아인들은 아직도 시아누크 치하의 ‘아시아의 진주’로서의 프놈펜을 기억하고 있다. 전전기에 대한 이들의 집단 기억에는 당시의 생생한 음악도 포함되어 있다. 크메르 공화국과 민주 캄푸치아라는 두 정권은 노로돔 시아누크의 상큼 리어스 니윰(인민사회주의공동체) 시기의 음반, 카세트, 라디오, 전축 등 각종 ‘반동적’음악의 흔적을 지워버리려 했었다. 나아가 이들은 거의 대부분의 대중음악 뮤지션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전기 음악을 되살리고 그 음악에 대한 집단 기억을 통해 다시금 뭉치려는 캄보디아인들의 강한 의지가 있었다. 로큰롤 시대를 겪었던 이들은 당시 인기곡들의 멜로디와 노랫말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캄보디아의 젊은 층은 물론 해외 동포들 역시 자신들의 부모 세대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알 수 있게 되었다.
--- p.75~76, 「린다 사판·네이트 훈, 캄보디아 대중음악과 정치적 음악」 중에서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 독립한 1953년부터 ‘크메르루주 학살’이 자행된, “상상력을 말살한 잔혹함의 시기” 1975년까지 20년 동안 현대 캄보디아인들은 도시의 삶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넓게 잡아보면 1960년대로 명명할 수 있을 이 시기에 캄보디아인들은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을 어떻게 시각화했을까? 이 나라에서 록 음악과 대중문화는 어떻게 여타 형식의 현대미술 및 문화와 교차했을까? 그리고 이 문화가 국내외 록 음악 및 도시의 청년문화 현상들과 어떻게 교차했을까?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의 레코드 음반 커버는 이 시기 캄보디아 도시의 후끈하고 섹시하고 밝고 과감한 세계를 고유한 방식으로 들여다보게 해준다. 이 음반 커버들을 통해 캄보디아인들의 도시 인식에 대해 어떤 매체와도 다른 독특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p.290, 「로저 넬슨, 1960년대 캄보디아 음반 커버에 드러난 ‘최근성’과 도시의 삶」 중에서
원래 캄보디아의 팝 음악은 람봉, 람사라반, 람크바크 등의 캄보디아 전통음악의 리듬으로 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부터 1964년까지 이런 리듬은 재즈 뮤직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때는 캄보디아 전통음악과 해외에서 가져온 음악이 같이 제작됐는데, 신 시사뭇이 당시 왕실 음악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국왕과 함께 프랑스나 싱가포르 쪽으로 가서 여러 가지 해외 음악을 접하고 그 음악을 가지고 캄보디아식으로 만들었죠. 1960년대에는 캄보디아에서 블루스, 차차차 리듬으로 작곡된 곡이 만들어졌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는 그 흐름이 록 음악으로 바뀌었습니다. 1969년부터 1970년대에는 로큰롤이나 하드록 같은 것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 p.313, 「토크: 캄보디아 대중음악의 황금시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