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는 새로움이다. 창조라는 말은 모든 존재의 최초에만 단 한 번 명명될 수 있는 거룩한 단어다. 정보와 빅데이터가 범람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야말로 창조적 사고가 관건이다. 뻔한 정보와 기계적 사고로 무장한 인재가 아니라 자기 머리로 자기만의 생각을 할 줄 아는 인재야말로 이 시대가 꼭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어령의 생각의 탄생’을 말하는 이 책은 지금 시대에 더욱 긴요하다. 이 책의 쓰임새는 이어령 교수의 다음 말에 담겨 있다. 자신을 일컬어 천재 운운하는 이들에 대해 펄쩍 뛰면서 하는 답변이다.
“나는 천재가 아니야. 창조란 건 거창한 게 아니거든. 제 머리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누구나 나처럼 생각하면 나처럼 될 수 있어요. 진짜라니까.”
이어령 교수는 이 말을 열 번도 넘게 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이어령 교수처럼 될 수 있다니, 누가 봐도 언감생심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심오한 지적 세계를 탐험하는 여정에 동행하면서 시나브로 아주 조금씩 동의하게 됐다. 그를 만나고 나오면 일상의 사물이 평소와 달라 보였고, 그의 생각의 줄기를 따라가면서 ‘원래 그런 것’은 세상에 없다는 걸 하나둘 깨닫게 됐으니까.
--- p.9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잖아. 거리두기를 하면서 우리는 평소 잊고 있던 ‘거리’를 자각하기 시작했지. 나와 타인과의 거리, 개인과 집단과의 거리, 국민과 국가와의 거리, 자국과 타국과의 거리, 생과 사의 거리,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거리 같은. 모든 타자와의 거리를 발견한 것이지. 그동안의 삶의 방식, 그동안의 삶의 속도와 다른 삶을 살면서 잊고 있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어. 혼돈의 시기에는 자기 자신의 성향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해.
--- p.22~23
“혼나는 게 무섭진 않으셨어요?”
그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어른들한테 구박도 많이 받고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 혼나면 물론 무섭지. 혼나는 게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딨겄어. 그런데 나는 이런 반응에 굴하지 않았어. 지적 호기심이 워낙 컸거든. 혼나는 걸 각오하고서라도 그 질문을 해야 했지. 어린이의 눈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경이롭게 보여요. 이름 모를 풀과 나무, 어둠 속에서 들리는 벌레 소리, 달빛 속의 그림자, 나는 그것들과 이야기하고 물으면서 그 두꺼운 껍질들을 벗기고 싶은 욕망으로 온몸이 근질거렸어요. 나만 이랬을까? 아니야. 세상 모든 아이들은 다 같아요. 다만 선생님들에게, 어른들에게 길들여지면서 호기심을 잃어버린 거지.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품었던 수수께끼를 푸는 감동을 그리스어로 ‘타우마젠(thaumazen)’이라고 해요. 타우마젠! 호기심이 해소되는 순간, 다시 말해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 말이야. 그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어. 나도 모르게 막 탄성이 나오지.”
인터뷰 첫날,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물음표가 있었기 때문에 느낌표가 생기는 거예요. 목마름 없는 지식은 고문이야.”
--- p.55~56
“상처 위에 생긴 딱쟁이가 떨어지면 여린 새살이 나잖아. 한자와 그 많은 외래어들은 한국인의 마음에 난 상처를 덮은 딱지 같은 거예요. 그게 떨어지면 그 안에서 나온 새살의 감촉과 예민한 신경줄 같은 뜻이 살아나는 거고. 한국말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아무 데나 만진다고 간지러워? 아니잖아. 간지럼 타는 부분이 따로 있듯, 같은 뜻의 센서티브한 말들이 있어요. 좋은 말이라도 자꾸 쓰면 굳은살이 박이지. 일상어는 발뒤꿈치처럼 굳은살이 박인 언어고.”
모국어로 생각하기. 이어령 교수가 가진 창조력의 씨앗은 지극히 당연한 이 말 속에 녹아들어 있다.
--- p.103
“그 반짝이는 창조적 아이디어는 언제 어떻게 머릿속에서 탄생하는 걸까요?” 메모하는 광경을 보며 뻔한 질문을 나도 모르게 흘려버렸다. 사실 독백에 가까웠지 딱히 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는데, 이 교수가 후훗 웃더니 한마디한다.
“좋은 아이디어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내리기 전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해요. 또 만인이 납득하는 아이디어는 아이디어가 아니지. 낡은 생각이라는 증거니까.”
그의 답에서 이런 핵심어들을 뽑아낼 수 있겠다. ‘번쩍’과 ‘외로움’, 그리고 ‘리스크’. 창조적 아이디어는 번쩍 떠오르는 것이고, 남들을 설득하기 힘든 외로운 것이며, 그만큼 리스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 p.158
“그런데 그걸 어떻게 구현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고, 그 생명의 의미를 세계에 던진 메시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어? 그런데도 그 비밀과 아이디어의 뒷얘기를 묻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외롭다는 거지. 사람들은 내가 시대의 중심인 줄 아는데, 아니야. 어떻게 보면 나는 우리 시대에서 늘 소외돼 있었어요.”
시대를 앞서간 이의 걸음은 외롭다. 생각해보면 이어령 교수는 너무 많이 앞서 있었다. 그가 제시한 새 시대의 패러다임은 반 발자국이 아닌 한 발 이상 앞서 있었다. 디지로그도 그랬고, 생명자본주의도 그랬다. 동시대 범인(凡人)들이 그가 제시한 패러다임의 의미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숭앙할 만하면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으며, 더 멀찌감치 앞으로 나아가 또 다음 세상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속도는 범인의 그것보다 빠르기에 그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 p.275~276
인터뷰 다음 날, 이어령 교수의 메일이 도착했다. 미래학자로서의 혜안을 담은 묵직한 내용의 편지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인 동시에, 기술로 인간의 죽음을 극복하는 시대가 임박한 시점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악마의 속도’라는 말을 씁니다. 정보의 속도, 혹은 무어의 법칙에 의한 반도체의 발전 속도는 기하급수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의 생명시계는 수만 년이 지나도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문명의 발달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태내에서 생명이 자라는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10개월을 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디지털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아날로그의 영역인 자연에서의 생명 활동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쉬운 예로, 비즈니스가 네트워크를 통해 웹으로 이루어지면 해외출장이 줄어들어 항공업체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출장은 더 증가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전화나 메신저로 실컷 이야기한 뒤에도 ‘자세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전화로 이야기한 내용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정보의 온도 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재택근무, 소호SOHO, 스마트워크 등이 급부상하면서 제기됐던 우려들도 대부분 예상에서 빗나갔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지요.
세상이 아무리 디지털화되더라도 인간의 신체에는 사이버 세상의 논리가 그대로 통용되지 않습니다. 디지로그는 단순한 감성공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속도와 정보의 속도를 어떻게 조정하고 조화시킬 것인가’가 디지로그 이론의 최종적인 해답입니다.”
--- p.304~305
내가 평생 창조, 창조 해왔잖아. 내 손에서 탄생한 우물물 한 방울이 생명의 순환을 고스란히 따랐으면 해요. 한 인간이 남겨놓은 열정 한 방울, 창조성 한 숟가락, 업적 한 그릇이 이어져서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다시 수증기가 되어 비로 내리고, 골짜기에 쏟아지고, 또 그 물 한 방울이 다시 누군가의 가슴에 작은 울림을 주면 좋겠다는 거지.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일 아니겠어요?
--- p.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