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이 불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일은 조선이 불교를 믿지 않는 나라임을 선언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것은 대단히 독특한 체제에 대한 구상이었다. 중국, 한반도, 베트남 등의 왕조들은 일반적으로 유교, 불교, 도교 등 삼교(三敎)를 모두 공식종교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었다. 개별 군주의 취향이나 정책에 따라 각 전통의 세력은 약해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했지만, 조선은 오직 유교만을 숭배하는 국가체제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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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는 왕실의 불교 숭배가 유지될 수 있는 중요한 명분이었다. 왕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불교 신앙이 깊었고, 유자를 자처하던 왕들도 부모의 장례에는 불교 의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불교는 유교 전통에 비해 죽은 자를 천도하는 기능에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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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천주교의 비극은 중국에서 이런 상황이 진행된 후에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도입했다는 데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 없이 서학을 공부하며 자생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조선의 신자들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중국 지역의 예수회가 해산한 이후, 청에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유교식 제사를 강경하게 금지하던 인물들이었다. 결국 조선에는 제사를 지키기 위해 천주교를 버린 인물과, 조상의 위패를 철거하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려는 인물들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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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천자는커녕 안정된 벼슬자리도 얻지 못하고 천하를 유랑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사당에서는 황제의 형상을 하고는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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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적 관점에서 조선의 건국은 신유교를 통한 유교화의 개시이기도 했다. 그 신호탄은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佛氏雜辨)』이었다. 이전에도 불교의 무분별한 사찰 건립이나 정치 개입에 대한 유자들의 경계는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의 비판은 그런 차원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그는 불교의 세계관, 우주론, 형이상학, 수양론, 인간론, 도덕론을 모두 부정하며 이를 엄밀한 유교의 것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데에는 신유교를 받아들인 지식인들의 자신감에 있었다. 송대 신유교는 유교나 도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던 종교적 세계관을 자기완결적인 체계로 완성하려고 한 시도였다. 고려 왕조와 원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최적의 이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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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왕도에는 불교 사원이 건설되지 않았다. 대신 유교 의례를 위한 공간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었다. 승려와 무당은 도성 밖으로 추방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관습과 문화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왕도 한양에서는 비교적 빠르게 ‘정복’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도성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통치력은 순식간에 힘을 잃는 듯했다. 산과 강 너머에 있는 광대한 지방의 영역 또한 미정복지로 남아 있었다. 결국 유교화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왕조가 멸망하는 그날까지도 완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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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관리들은 도성의 신들에게 절하고, 아이들은 도마뱀이 들어있는 항아리를 두들기며, 무당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신에게 절박하게 외치고, 절에서는 승려들이 모여 기도를 하는 것이 유교 국가 조선의 기우제였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신유교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까지도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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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상으로는 도성 안에 무당이 출입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궁궐 안에까지 들어와 활동하는 무당들이 있었다. 특히 궁중의 여성들은 공공연하게 무당을 불러들여 기양(祈禳)을 하였다. 그중에는 국무(國巫), 즉 나랏무당이라고 불리는 인물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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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민족문화의 잔재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무속이란 민족 그 자체처럼 ‘만들어진 전통’이다. 무속의 원형이란 것이 머나먼 과거에 온전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도 허구고, 그것이 타락과 쇠퇴를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이 비루한 형태가 되었다는 것도 오늘날 재구성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런 허구를 믿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담론이 왜, 어떤 시대에 나타나서 유행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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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끌어들이는 것과 재앙을 멀리하는 것[祈福禳災]’은 원시종교부터 현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신종교에 이르기까지 종교가 일반적으로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종교가 기복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속의 영향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적인 교리나 윤리적인 가르침 같은 것은 종교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장식’에 가깝다. 이런 제도적 ‘장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속은 외부의 공격에 취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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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은 마치 ‘무당처럼’ 귀신들과 소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당이 일반적으로 귀신을 ‘모시고’, ‘달래는’ 것과는 달리, 선비들이 귀신을 다루는 방식은 훨씬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다. 귀신을 다루는 술법은 관직에 있는 이들이 아닌 재야의 선비들이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관리처럼 귀신을 권위와 위엄으로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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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은 무당처럼 신들 또는 죽은 자들과 꿈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무당이 어찌하지 못하는 산신의 재앙이나 마마신이 퍼트리는 역병도 제어할 수 있었다. 조상신과 가장 바르게 접촉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기를 물려받은 자손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선언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유자가 작성한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유생은 자신이 무당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과 조상을 무당보다 훨씬 더 잘 모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사고가 당시 민중의 폭넓은 동의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야담 자료에는 이와 대조되는 또 다른 이야기도 나타난다. 조상신이 유교식 제사보다 무당의 굿을 더 선호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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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종교의 무대에서는 유생도 무당도 의례의 주도권과 영적 권위를 놓고 경합하는 각각의 종교전문인일 뿐이었다. 이 조건 속에서 유자는 사회적 지위와 권위에 있어 우위에 있었고, 무당은 광범위한 민중의 종교적 심성과 수요를 만족시키기에 더욱 익숙하고 적합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국가 의례체제에 포섭되어 있어 유교의 침투가 용이했던 성황, 산신 등 지역 신에 대한 의례에서는 유자의 장악력이 커져갔다. 그러나 망자의 영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접근권에서는 무당의 우세가 유지되었다. 결국 민속종교 무대에서 조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교화’를 완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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