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사랑에 관해 질문하거나 받을 때가 있지요.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간편하고 납작하게 사용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눈이 멀고 숨이 멎으면 사랑의 잔혹은 사랑의 매혹으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사랑의 복잡성과 만만치 않음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에는 등을 돌려버리는데요. 어디 사랑에 관한 직무만 그러할까요. 사랑 안에 서식하는 ‘유치’와 ‘찬란’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잘 번식하기 위해 불완전하기로 결심한 개체 같습니다.
어느 날 사랑이 찾아와 내 곁에 앉아 말하지요. ‘네가 왜 웃는지 혹은 우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왔다’고,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사랑의 불완전, 사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그녀)의 사랑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싶은, 그러니까 사랑은 사랑이라는 언어의 욕망,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고 실현한 적 없으므로 사랑은 순순히 욕망의 자리에 놓이게 되지요.
언어를 ‘살갗’이라고 하며 바르트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고 합니다. 열 없는 이마에 따뜻한 손을 얹으면 이마는 문득 펄펄 끓어야 하고, 세상의 입들은 모두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고, 하여 ‘많이 아파?’라는 말은 그 대답을 위해 스스로 만든 ‘꾀병’에 걸려야 합니다. 말만으로도 온몸이 아파옵니다. 그러나 괜찮아요. 이 아픔은 ‘사랑이 내미는 호의’라서, 온몸이 아픈 데도 불구하고 아픈 몸은 새의 날개처럼 즐겁기만 합니다.
사랑을 내 말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지며, 애무하며, 혹은 이 만짐을 이야기하며 관계를 지속하고자 온 힘을 소모한다고 하죠. 그래서 사랑의 기쁨은 ‘영원’이나 ‘통속’을 소환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영원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려고 하지요. 따라서 서로에게 충족된 연인들은 글을 쓸 필요도 없고, 전달하거나 재생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몸이 앞서 기울어져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랑은 생각의 가지를, 생각의 날개를, 생각의 뿌리를 갖게 합니다. 나를 보다 수다스러운 나로 바꾸어 놓지요.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허약하고. 절절하여 사랑의 언어 속에서 당신을 읽으며 나를 잃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유감없이 발설함으로써 그 사람의 영혼을 만지고, 만진 손으로 자신의 영혼을 만지려는 이중의 접촉을 시도한다죠. 따라서 사랑의 언어는 비틀거리고 휘청거리며 거대한 심연의 바닥을 종횡무진합니다.
대체로 사랑의 푼크툼에 빠진 이들은 시시콜콜해집니다. “사랑해.”, “뭐 하고 있어?”, “밥 먹었어?” 시시콜콜한 유희를 반복하지요. 그들만의 방언을 만들어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 세계의 극점에는 모든 것이 ‘감각화’된 채 누구도 등장하지 않는 거울이 등장합니다. 말랑말랑한 감각은 망각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중의 거울이 되지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만 더 사랑의 배반을, 고통을, 고독을 긍정해 보는 것은 어떤가요?
---「사랑의 단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