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설화의 더 결정적인 성공 비밀은 결핍의 상상적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핍의 부단한 생산’에 있다. 공주설화의 현대적 기능은 현대 광고의 기능과 극히 유사하다. 광고가 소개하는 것은 소비자가 아직 갖고 있지 못한 ‘신상품’이므로 광고는 신상품을 보여주면서 사실은 소비자의 ‘결핍’을 지적한다. 광고는 광고의 순간에 결핍을 생산한다. 이 결핍 생산이 노리는 것은 충족과 모방의 ‘욕망’이며, 이 욕망으로부터 촉발되는 것이 욕망 추구의 서사, 곧 소비행위이다. --- p.25
낙원은 인간이 ‘되찾고’ 싶은 그리운 곳, 기억과 향수와 회복의 대상이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인간이 되돌아가고자 하는 땅이 아니라 장차, 미래에, ‘만들고’ 싶어 하는 나라이다. 그것은 회복 아닌 창조의, 그리고 노스탤지어(Nostalgia)가 아닌 희망의 대상이다. 낙원 사상은 상당히 오랜 지성사적 전통을 가진 반면, 이상향주의는 비교적 가까운 근대의 산물이다. 낙원 사상이 다분히 정신적 함의들을 지닌 전원(田園)과 연결되는 데 비해, 근대 이상향주의는 성공한 세속도시와 연결된다. --- p.41
아무도 고통 그 자체를 예찬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인간이 고통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승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기이한 역설이다. 이것이 고통의 의미이며, 문학의 진리는 인간 존재의 그 기이한 역설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 p.100
관용은 타자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라는 점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 용서, 관대함과는 다르다. 그것은 타자가 존재할 권리, 그의 자유, 그의 존엄과 품위에 대한 인정이자 존중이다. 관용은 쉬운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독선과 편협, 나의 진리 주장과 이해관계 관철의 욕망을 희생하도록 내게 요구하고(물론 이 희생은 포기가 아니다), 내가 내 속에 타자의 공간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쉽지 않기 때문에 관용은 문명이 힘들게 만들고 지켜가려는 ‘자산’이다. 한 가지 예에 불과하지만, 문명을 문명이게 하는 것은 이런 자산이다. 관용의 가장 큰 자산적 가치는 그것이 없거나 무시될 때, 바스라지고 파괴될 때, 인간들 사이의, 국가와 국가들 사이의 공존은 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다. 공존은 문명의 정의(正義)이다. --- p.113
서슴없이 말하건대 우리 사회에서 공적 담론을 납치하고 실종시킨 것은 정치, 자본, 미디어의 세 세력이다. 정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집단은 사적 이익추구집단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정당은 공당(公黨)이기보다는 공당을 참칭하는 ‘사당(私黨)’이며, 그것이 추구하는 것은 공공의 선이 아니라 정당의 사적 소유구조를 영속화하고 독과점적 ‘정치계급’을 공고화하려는 이해관계이다. 이런 이해관계의 고착과 그것에 의한 조작 때문에 우리의 경우, 마침내, 선거조차도 민주주의에의 기대를 배반한다. 정당정치 행태는 유권자로 하여금 투표할 이유를 알 수 없게 하고, 정치언어는 공론의 언어가 끼어들기 어려운 기만과 욕설의 언어가 되어 국어 타락의 한 절정에 도달하고 있다. --- p.199
무의미한 세계를 어떻게 의미 있는 세계로 바꿀 것인가? 현대과학과 실존주의 철학이 세계의 냉랭함에 대해 말하기 훨씬 전 이미 고대의 신화작가, 서사시인, 이야기꾼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이 무의미성(meaninglessness)의 도전이다. 이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제기한 첫 번째 도전이다. 이야기는 이 도전에 대한 인간의 대응방식이다. 인간은 이야기로 차가운 세계를 인간화하고 의미를 집어넣고 목적과 질서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는 인간이 자연세계에 덮어씌운 의미의 그물망이다. 이 그물망이 ‘상징우주’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창조해낸 그 상징우주가 인간에게는 존재의 집(house of being)이고 그의 고향(home)이며 그의 터전(turf)이다. 그 고향을 떠나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
--- p.24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