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는 이어서, 철학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단 하나의 목표인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셈이며,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네.” --- p.23
이런 의미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은 실제로 일종의 심리 치료인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앨버트 엘리스는 에피쿠로스 철학이 인지심리치료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으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동요의 대부분이 외부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한다는 관점에서 스토아 철학이나 불교와도 궤를 같이한다고 보았다....(중략)... 우리의 공포와 불안은 흔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데 기인하기 때문이다. 잘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못 이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위협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공포와 불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세계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 p.24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평정, 즉 정신적 동요가 없는 상태다. 또한 우리는 가능하다면 육체적 고통도 피하고 싶어한다. 에피쿠로스 철학에서는 고통 역시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정신적 고통보다 육체적 고통이 훨씬 견디기 쉽다고 보았다. --- p.40
이런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의 호라티우스도 똑같은 고민을 성찰한 바 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며 자기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을 질투한다. “만족하는 건 불가능해. 사람의 가치는 가진 게 많을수록 높아지거든.” 이렇게 말하는 자에게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계속 비참하게 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비참한 삶을 즐기는 것이니까. --- p.48
에피쿠로스의 대답은 명백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물건뿐이며, 나머지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상 얼마 되지 않으며 따라서 비교 적 쉽게 구할 수 있다. --- p.51
더 큰 쾌락을 위해 끝없이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하는 소위 ‘쾌락의 러닝머신’에 매일 필요가 없다. 에피쿠로스도 말했듯이 “충분함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 p.52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참된 친구 사이에는 불운한 상황에 처해도 상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무언의 확신이 항상 있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최고의 우정이란 단순한 상호 원조 관계에 그치지 않되 상호 원조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우정이 상호 원조에 국한된다면 상업적 거래와 다를 바 없지만, 그 중요성을 간과한다면 미래에 대한 안정감이 사라 진다는 것이다. --- p.64
에피쿠로스의 우정론은 전반적으로 친구 관계의 핵심을 포착하고 있는 듯하다. 우정이란 서로 배려와 도움을 주고받되 단지 호의의 교환에 그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관계인 것이다. --- p.65
만족이란 질적인 것이지 양적인 것이 아니기에, 만족스러운 정도가 그것이 지속된 시간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만족스러운 상태가 길어진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 느끼는 만족이 더 커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런 만족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면, 만족감이 얼마나 지속되 든 우리의 삶은 이미 완벽한 것이다. 필로데모스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단 하루에도 영원에서와 똑같은 쾌락을 얻을 수 있다.” 혹은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이렇게도 말 할 수 있다. “무한한 시간이 유한한 시간보다 더 큰 쾌락을 주는 것은 아니다.” --- p.98
“우리는 단 한 번 태어난다. 두 번 태어날 수 없으며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내일을 통제할 수 없는데도 내일을 위해 오늘의 기쁨을 미룬다. 인생은 그런 유예 속에 낭비되며, 결국 모두가 그렇게 일만 하다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