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내가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가 떠오릅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기다린 만큼 너무나 감격스러웠던 순간이었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아이가 생기면 누구보다 아빠 역할을 잘할 줄 알았습니다. 아이들을 살뜰히 대하고 아내를 위하는 남편이 될 자신이 있었죠. 그런데 그게 참, 마음처럼 쉽지가 않더군요.
직장에서의 역할이 늘어나면서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집안일도 잘하고, 가족들과도 재미있게 놀고 싶은데 막상 집에 오면 쉬고 싶을 때가 많았죠. 인류 역사를 통틀어 오늘날의 아빠가 가장 힘들다고 했던 미국의 교육학자 존 바달라먼트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일과 가정의 균형 사이에서 힘들어하던 저는 우연히 마음공부를 통해 제 마음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사회가 원하는 이상적인 아빠가 되고 싶은 나, 퇴근 후 왕 대접을 받으며 쉬고 싶은 내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알았으니 해결방법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빠가 가족을 위해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더 일하고, 아이들에게는 더 다정하고, 집안일도 더 열심히 하는 슈퍼맨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찾은 진짜 해결책은 아빠가 슈퍼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빠는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적은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육아를 하는 것이었죠.
--- 「프롤로그」 중에서
육아를 나 혼자 하는 것 같다. 엄마들이 아빠들에게 가지는 가장 큰 불만 중 하나입니다. 아내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아빠는 일단 발끈합니다. “바쁘니까 그렇지!”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려 하지요. 하지만 내심 뜨끔합니다. 솔직히 말해 아내만큼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018년, 육아정책연구소에서 실시한 ‘부모가 자녀 양육을 어떻게 분담하는 것이 적절한가’의 설문조사 결과를 봐도 그렇습니다. 설문에 참여한 3천여 명의 응답자는 양육 부담을 총 10이라고 했을 때 엄마 5.74, 아빠 4.26의 양육분담이 적절하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들의 실제 양육 부담 비율은 어땠을까요? 엄마는 6.86, 아빠는 3.14였습니다. 머리로는 육아에 좀 더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빠들은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공동육아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는 것입니다.
“관심 좀 가져!”라는 아내의 주문에 부응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1장_엄마 사랑하는 아빠] 중에서
아버지 세대의 노력 덕분에 지금 우리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도 잘 알고 있어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많은 추억을 쌓으려고 노력합니다. 어쩌면 요즘 아빠야말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세대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요즘 아빠들의 현실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요즘 아빠들은 아빠 육아의 중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부담을 느낍니다. 이들은 사회가 말하는 이상적인 아빠 육아와 나의 현실 사이에서 상당한 괴리감을 느낍니다.
(...)
직장인 아빠의 마음에는 보통 두 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공동 양육자로서 아빠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집에서만큼은 좀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입니다. 보통 이 두 가지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야근과 회식이 많은 직장인 아빠일수록 첫 번째 마음과 두 번째 마음의 변화 폭이 더 심합니다. 일이 고되다 보니 몸과 마음이 더 빨리 지쳐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때 ‘다른 남편은 어떠하더라.’라는 아내의 비교는 아빠 역할을 잘해야겠다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내가 회사에서 놀고 온 줄 알아?” 하며 불필요한 말을 내뱉게 하지요. 비교에 대한 반발심이 하필이면 가장 가까운 관계인 아내의 말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 「2장_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중에서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놀랍게도 그 원인이 아이보다는 건강, 경제, 직장 등 외부 문제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들이 유별나게 굴었을 때가 아니라 건강문제로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시기의 육아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힘들었던 육아는 나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아내를 거쳐 아이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에야 조금씩 개선되었습니다. 아이만 바라보던 제 시선을 아내에게로 옮긴 계기가 되었죠. 아내의 행복에 집중한 이후 저와 아내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행복이 떨어져 있던 저의 자존감까지 회복시켜 주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저는 낮은 자신감,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마음을 살피는 연습을 계속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의 마음은 음 소거 상태였다는 것을요. 마음은 그동안 수없이 제게 말을 걸었지만 저는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볼륨을 키우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반복되는 패턴에 숨어있는 불편한 기억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했죠. 그 과정을 거친 후에야 진짜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제게 듣고 싶었던 말은 “힘들어도 이겨내야 해.”, “좀 더 노력해야 해.”와 같은 극복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많이 힘들었구나.”, “괜찮아, 수고했어.”와 같은 공감의 말이었죠. 마음의 소리에 공감하자 비로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씩 차올랐습니다.
--- 「3장_토닥토닥, 자기 돌봄의 필요성] 중에서
일본의 정신분석학자 오카다 다카시는 그의 책 《아버지 콤플렉스 벗어나기》(이숲)에서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 몫을 하는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쏟아붓는 애정에 빠져 지내지 않고 욕망에 한계를 부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아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아빠일까요? 아이가 좌절과 한계를 경험하게 하는 일이 아빠에게 더 적합한 이유는 아이가 아빠와 엄마에게서 느끼는 존재론적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이에게 엄마는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풍요로운 세계입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엄마에 의해 충족되면서 아이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자기애를 쌓아가지요. 반면 아이에게 아빠는 엄마가 가지고 있지 않은 힘을 가진 새로운 세계입니다. 특히 아이의 눈에 신과 같은 엄마가 아빠의 권위를 인정할수록 아이가 느끼는 아빠의 힘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리고 아빠는 이 힘을 바탕으로 아이에게 사회의 규율과 엄격함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아빠의 권위는 아이를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우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고 규칙을 따르며 성장하게 해줍니다. 아빠가 자녀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아빠만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따로 있다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권위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권위도 있어야 합니다. 권위만 있는 아빠는 무서움의 대상이지만 권위도 있는 아빠는 존경을 받습니다.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권위도 있는 아빠가 되는 것, 어렵지만 아빠의 이런 노력은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4장_아빠 육아, 이래서 필요합니다] 중에서
서로 사랑해서 행복하려고 한 결혼생활이 육아 문제로 삐거덕거리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남편, 내 아내는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기대와 다른 그(그녀)의 행동은 서운함을 불러일으키지요. 아내와 남편 모두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털끝을 삐죽 세운 고양이처럼 상대방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육아에서 시작된 이러한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앞서 댓글을 달아주신 남편들은 집안일에 손도 대지 않고 아이와 소통도 하지 않는 가부장적 아빠들이 아닙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분들이시죠. 이분들에게 “육아는 공평해야 합니다. 직장 일 때문에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남편이 더 노력해야지요.”라는 말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육아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7장_아빠이자 남편으로 살아가는 기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