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엔 우리말 이름을!
현재 우리나라의 행정 구역인 시, 도, 군, 읍, 면, 동, 리를 통틀어 토박이 이름을 되찾아 쓰는 곳은 ‘서울’ 한 곳뿐이다. 땅 이름은 단순히 토지나 장소의 이름만이 아니다. 한 동네의 지형적 특징, 역사와 자연 환경, 전통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귀중한 무형 문화재이며 조상들의 영혼과 지혜를 담고 있는 훌륭한 유산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일제 강점기 때 빼앗긴 이름을 60년이 지난 지금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문경읍 지도에 나타나 있는 이 근처 동네 이름도 아랫파발, 점말, 새술막, 곰지골, 한여골 등 가지가지로 예쁘다. 어제 문경 새재 입구에 있던 마을 이름은 듣기에도 정이 가는 데다 심지어 이국적이기까지 한 ‘푸실’이었다. 풀이 우거졌다는 뜻의 ‘풀’에다 마을을 나타내는 ‘실’을 합해 ‘풀실’이 되고, 거기서 발음하기 어려운 ‘ㄹ’이 탈락해 ‘푸실’이 되었단다. 다른 지방에 있는 ‘푸시울’이나 ‘풀실’도 같은 뜻이다. 푸실! 소리 내어 한번 불러 보라. 참 예쁘지 않은가.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 뜻도 좋은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두고 일제 강점기 때 편한 대로 지은 상초리(上草里), 하초리(下草里) 등을 지금껏 공식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정겹고 사랑스런 토박이 이름이 멋도 뜻도 없는 한자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는 수천수만 가지다. 곰내가 웅천(熊川), 까막다리가 오교(烏橋), 도르메가 주봉(周峰), 따순개미가 온동(溫洞), 숯고개가 탄현(炭縣), 짚은 내(깊은 내)가 심천(深川), 구름터가 운기리(雲基里) 등 생각나는 대로 살펴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무엇이 나라 사랑일까?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우리가 물려받고 또 물려줄 우리 땅 이름에 관심을 갖고 그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나라 사랑이다.---p.25
만 권의 책만큼 값진 것
인도를 여행할 때 뉴질랜드에서 온 가족을 만났다. 삼십대 후반의 엄마 아빠와 열 살짜리 남자아이 앤디,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 제시카, 이렇게 네 명이 1년간 아시아를 여행하고 있었다. 나와 만났을 때는 벌써 8개월 동안 타이, 베트남, 중국, 티베트, 네팔을 거친 뒤였다. 인도를 돌고 파키스칸, 이란을 거쳐 터키에서 여행을 끝낼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들과 다니면서 내가 우선 놀란 것은 앤디와 제시카의 독립심이었다. 그 아이들은 자기 짐을 스스로 지고 다녔다. 좀 버겁다 싶은 배낭인데도 부모는 절대 거들어 주지 않았다. 숙소를 정리한다든지, 빨래를 널고 개는 일도 모두 알아서 했다.
나를 다시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인내심이다. 한번은 콩나물시루 같은 열차를 타고 서서 가게 되었다. 어른인 나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힘든데, 아이들은 짜증을 내기는커녕 자가용을 타고 있는 듯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도 기특해서 “힘들지?” 하니까 “아니요, 중국에서는 이렇게 서서 열다섯 시간을 간 적도 있는데요.” 한다. 여느 때는 끼니 대신 콜라가 있어야 하고, 시간만 나면 휴대용 게임기를 꺼내고, 둘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티격태격 싸우고, 공부하는 시간만 되면 도망 다니고, 곰 인형을 배낭에 넣고 다니는 영락없는 꼬마들이지만, ‘선택한 방랑 생활’을 통하여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누구나 오랫동안의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할 필요도 없다. 세계든 제 나라든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많이 부딪히고 보고 느끼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스스로 깨닫는 ‘학습’ 시간이라는 점에서 여행은 중요하다.
중국에는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여행한다.”라는 말이 있다.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여행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여행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의미 있는 공부이다.---p.65~66
죽은 자를 위한 나라
도보 여행 46일째. 통일 전망대까지 앞으로 약 60킬로미터. 온몸에서 파스 냄새가 진동을 한다. 오른쪽 발목의 부기도 여전하고, 오른쪽 무릎이 반복적으로 삐끗거리며 시리다. 누가 옆에 있으면 실컷 엄살을 부리고 싶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일생에 한 번 마음먹고 하는 국토 종단인데, 이 정도도 힘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다.
잠깐 쉬고 좀 더 걸을까 했는데 거기 모인 어르신들 얘기가 하도 흥미로워서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속초 청호동에 사시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라는 할아버지가 남한으로 내려와 사시던 곳은 38선과 만세 고개에 걸쳐 있어 한국 전쟁 중에 여러 번 이남, 이북이 바뀌었던 지역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피난 내려올 때도 며칠 있으면 다시 올라가겠거니 생각하고 잠깐 짐을 부린 것이 오늘에 이르렀단다. 이렇게 내려온 북한 피난민들 때문에 조그만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속초가 오늘날과 같은 도시의 꼴을 갖추게 되었는데, 지금도 70세 이상의 속초 사람들 가운데 60퍼센트가 실향민이란다.
이 할아버지 같은 월남 1세대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일이라도 통일이 되면 곧바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계신다. 애초부터 정착할 생각 없이 내려왔으니 당장이라도 올라갈 수 있도록 보따리까지 다 싸 놓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한다. 식구들을 그대로 두고 자기 한 몸만 내려오셨다니 외롭기는 얼마나 외로웠을 것이며, 잠깐 피해 내려온 것이니 뭘 변변히 가지고 왔겠는가. 하도 배가 고파 복어알도 숱하게 먹었는데 죽지 않고 여태까지 산 것만도 다행이라며 쓸쓸히 웃으신다. 재산 모을 생각이 없으니 버젓한 일자리도 없고, 맘 붙일 데 하나 없지만 언젠가는 돌아간다는 생각에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아온 이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흔하단다. “아주마이는 어째 이렇게 걸어 다니오?”
내일 모레가 여든이라는 할아버지들이 하나같이 어찌나 억센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지 꼭 북한에 온 것 같다. 우리들에게는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분단의 아픔이 이들에게는 하루도 생각하지 않고는 지낼 수 없는 일상인 것이다. 1953년 휴전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통일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속칭 아바이 마을 사람들이다.
---p.108~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