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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의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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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의 토끼

이정은 | 청어 | 2021년 09월 0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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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9월 0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466g | 128*188*22mm
ISBN13 9791158609665
ISBN10 1158609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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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관계없다. 있지도 않은 신, 그 허상과 싸움이라도 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갈 수 없다. 지금부터의 기록은 생애 전체를 통해 신과 싸움으로 일관한 기록이다.
춘심은 아기 때문에 희망도 생겼고 살아갈 목적이 생겼다. 사노라면 온갖 고통과 싸울 힘도 생기겠지. 내 아기, 열 달 동안 내 몸속에서 함께한 분신인 아기를 생각하며 목숨 걸고 지켜내리라 결심했다. 춘심은 아기 이름을 ‘연화’라고 지었다. 혼탁한 세상이라도 연꽃처럼 청초하게 살라는 의미였다.
‘재주나방 애벌레’ 봄날의 ‘화려한 비상을 위해… 애벌레들의 치열한 생존기. 위장술의 달인, 재주나방 애벌레는 경계색인 붉은색 몸통에 삐죽삐죽 솟은 검은색 털로 공포심을 유발해 1차 보호를 한다. 그래도 공격하면 좀 더 적극적인 방어시스템을 작동한다. 마치 기계 선수처럼 몸을 뒤로 틀어 불룩하게 만든 후, 몸 앞부분도 들어 올려 뱀 같은 자세를 취한다. 재주나방 애벌레 가운데 2쌍은 다리가 기형적으로 자라 단순히 위협용이 아니라 실제로 앞발을 휘둘러 천적을 쫓아낸다. 검은 띠 재주나방 애벌레는 항문 쪽 다리 두 개가 꼬리처럼 변신했다. 자극을 받으면 방울뱀처럼 ‘따르르’ 소리를 내 천적을 쫓는다.
그때는 몰랐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질서, 나쁜 것에 종속되어 운명에 끌려 들어가고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되돌아올 때의 고통과 상실감을 저울로 달 수 없다는 사실을.
같은 조건이라도 남자아이는 처지가 다르다. 그 집안의 씨라는 존재이기도 하고 아무리 눈엣가시라 싫어도 집일을 시키지 않는다. 학교에 갔다가 눈을 피해 공부한다고 자기 방이나 친구의 집으로 스며들어 눈에 띄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혹독한 가사에 매달려야 한다.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언제나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한다. 한순간도 쉬지 못하게 한다. 끝도 없는 가사 일, 잔인한 일은 계속된다. 여자아이는 노동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근원적인 운명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니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죄를 짓게 되고, 왜 죄인이 되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선택권도 행사할 수 없이 타인 때문에 한 여자의 삶이 뒤죽박죽되고 있었다.
난폭한 운명 화살의 타격을 견뎌내는 것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의무인지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서 저항하며 그래도 희망을 바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인지 모른다. 아니면 그 반대로 고통을 끝내는 것이 더 편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건 자살이 개인의 선택이지 신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연화는 질주하는 기찻길 옆에 서서 철로를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마침 기차가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눈앞이 까마득한 암흑, 자신을 향해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기차가 자신의 목을 밟고 넘어가는 느낌이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목으로 갔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인간의 일생은 먼지와도 같다. 한순간도 못 되는 찰나를 살면서 울고, 분노하고, 적개심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이런 찰나의 삶이지만 삶은 누구에게나 무한히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이 반복될 것이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 하지 않던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자신이 엄마가 되려는 순간, 한 여자의 운명, 그 여인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진다. 험한 세상이라도 겪게 하고, 즐거움도 고통도 느낄 수 있게 한 것이 고마웠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훼손시킨 것이다. 내 아이에게 따듯한 가슴으로 지켜주어야 할 그런 엄마로 거듭나야 한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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