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을 찬미하라
‘한 나그네가 광야에서 사나운 짐승에게 쫓긴다. 맹수가 막 덮치기 직전에 나그네는 겨우 낡은 우물 하나를 발견한다. 허겁지겁 우물 속으로 넝쿨을 타고 내려간다.
한 길도 채 못 내려갔을 때 씨근거리는 맹수의 숨결을 머리 위로 듣는다. 숨을 몰아쉬며 겁에 질려 위를 쳐다본다. 짐승의 시뻘건 입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공포가 덮쳐 온다. 짐승은 으르렁거릴 뿐, 감히 내려오지는 못한다. 그제야 나그네는 눈을 감으며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쉰다.
맹수에게서 좀 더 멀어지겠다고 넝쿨을 타고 조금씩 아래로 내려간다.
바닥이 가까워지면서 무언가 아래에 꿈틀거리는 게 있는 것을 느낀다. 주의깊게 자세히 살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큰 뱀이 우물 바닥에서 위를 쳐다보며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가슴이 서늘해진 나그네, 내려가길 멈추고 그 자리에 선다.
위를 쳐다보니 짐승이 아직도 큰 입을 벌리고 있다. 바닥에도 역시 큰 뱀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정말 오도가도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아연해진 나그네, 흐트러진 생각을 바로 잡는다고 눈을 감으며 크게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넝쿨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넝쿨마저 놓쳐서는 큰일이다. 공포와 절망의 시간이 잠시 흐른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 쳐다보니, 아! 돌 틈에서 나온 쥐새끼 한 마리가 자기가 매달려 있는 넝쿨을 갉아먹고 있지 않은가? 하늘이 캄캄해진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구나. 눈을 다시 감으면서 입을 굳게 다문다. 세상의 마지막이란 이런 것인가? 끝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절망감.
이때 문득 입술에 와 닿는 게 있다. 살그머니 입술을 핥아본다. 달콤하다. 눈을 떠 보니 넝쿨 잎에 묻은 꿀이다.
나그네는 짐승도, 독사도, 쥐새끼도 잠시 잊은 채 넝쿨 잎의 꿀을 핥아먹는다. 이것이 인생이다.’
우리가 잘 아는 톨스토이의 《인생론》에 나오는 불교 설화이다. 아무려면 우리 인생이 짐승에 쫓기는 우물 속 인생일까? 북구(北歐)의 우울한 슬라브적 인생론이다. 인생 앞길에 어찌 사나운 짐승과 독사뿐이겠느냐? 광야에는 개울도 있고, 양지바른 언덕도 있다. 노루가 뛰노는 푸른 들과 빛나는 태양도 있다.
희랍신화에 보면 제우스가 여자를 최초로 만들었는데 이름을 판도라라고 하였다.
판도라란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이 최초의 여자를 만들 때 많은 신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신은 아름다움을, 또 어느 신은 음악을….
판도라는 우리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시집을 간다.
에피메테우스는 오래 전부터 상자 한 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인간의 불행을 포함하여 온갖 것들이 꽉 차 있었다.
호기심 많은 판도라는 어느 날 열지 말라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인간의 모든 질병과 원한, 복수, 질투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세상에 퍼지게 된 것이다.
놀란 판도라 재빨리 뚜껑을 닫았으나 이미 속의 것은 다 빠져 나가고 마지막으로 ‘희망’만이 상자 속에 남았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온갖 고통과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희망만은 잘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비록 ‘광야의 우물 속 인생’일지라도 나그네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믿음이 있지 않느냐?
온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찼다고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희망과 더불어 저 위대한 신을 찬양하는 것이다.
혜준아, 효정아,
너희는 대지의 다정한 속삭임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따듯한 봄날 들에 나가 보라. 응달에는 아직 흰 눈이 쌓여 있지만, 멀리는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온 세상은 생명의 환희를 노래한다. 성급한 들꽃은 잔설 곁에서 꽃을 피운다. 눈 녹은 물은 계곡 사이로 소리 내어 흐른다.
비 오는 여름날, 스카이웨이에 가 보아라.
팔각정에서 삼각산을 돌아본다. 눈앞의 자욱한 안개 속에 희뿌연 장막이 걷히면서 회색의 공간에 문득 우뚝한 산봉우리가 솟아오른다. 안개가 강물처럼 흐르면서 산허리가 우람한 몸집을 뽐내고, 뒤에 섰던 산봉우리도 교태를 자랑한다. 산허리와 봉우리가 숨바꼭질하듯 저마다 아름다움을 겨눌 때 샘이 난 안개가 온 세상을 다시 덮는다. 이윽고 지친 안개가 조용히 물러가면서 멀고 가까운 산봉우리들이 다투어 내 앞으로 다가온다. 마침내 흐르는 안개가 산허리를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덩달아 이웃한 모든 산까지 합세하여 너울거린다.
아! 어찌 저 아름다움을 그림에 비유한단 말인가!
효성아, 혜연아,
가을 단풍은 또 어떻더냐?
그 흔한 고속도로를 어디든 달려 보아라. 황금색 들이 너울거리며 이웃한 단풍과 푸른 솔밭에 손짓한다. 황금색 들판이 붉게 물든 단풍에 취하여 풍성한 수확을 마음껏 노래한다.
자동차가 달리고, 나도 움직이니, 멀리 불타는 단풍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다. 황금색 들이 수줍은 듯 물러서면, 그 자리를 오직 푸르른 소나무가 제 세상처럼 뽐낸다. 저 오묘한 빛살의 명암(明暗)과 아름다운 색조는 신이 우리에게 내린 천상의 선물이다.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 황금 들판에도, 불탔던 단풍 위로, 자태를 뽐내던 산봉우리에도 눈이 쌓인다. 온 누리는 순백색의 설국으로 변하면서 제각기 뽐내던 삼라만상은 백설 앞에 다소곳이 순종한다. 눈은 온 천지를 다 차지했어도 군림하지 않는다. 오로지 침묵으로, 오로지 순백색의 고운 자태로 승복시킨다. 백설은 제 목소리가 없다. 산같이 쌓여도 소리가 없는 게 눈이다. 완벽한 정숙과 침묵이 거기 있다.
바람이 분다. 가지마다 듬뿍 쌓였던 눈이 연기처럼 흩날린다. 눈덩이도 떨어진다. 마침내 무거운 침묵이 깨어진다. 바람 소리일까. 눈 소리일까?
이윽고 바람이 자면서 세상은 다시 태고의 정적으로 빠져든다. 물소리는 소리가 아니듯, 눈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비길 데 없는 태고의 침묵에서 할아버지는 우렁찬 천사의 합창을 듣는다.
대지를 찬미하라. 수십억이 살다 간, 또 살아 갈 우리의 어머니이다. 태양을 찬양하라. 뭇 생명의 아버지이니라.
2. 인생이란 무엇인가?
혜준아, 효정아,
사람은 아는 게 너무 많다. 그래서 질문도 많다. 그 중 고약한 질문 하나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게 아닌가 싶다. 수천 년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따지고 들었지만 아직은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돌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망치 소리인가, 돌의 소리인가?’ 와 같은 질문이요, 또 소리는 울렸으되 그 소리가 망치 소리인지 돌 소리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공자(孔子) 같은 위대한 스승도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내 어찌 죽음을 알리요” 라고 고백했던 게 아니겠느냐?
?
머리말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 지도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여러분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지금도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 없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에 비해 저의 글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이번 개정판의 출간(出刊)을 한참동안을 망설인 이유도 이런 책을 낸 다는 게 외람스럽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본래 출판을 위해 쓴 게 아니었습니다. 처음 1년 동안은 집안 식구들과 가까운 친지(親知)들이 돌려보는 작은 책자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주위에서 이 책을 원하는 사람이 넘쳐나면서 어쩔 수 없이 출판사를 통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은 오래전에 쓴 책입니다. 시대형편이 개정판을 내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개정판은 지금의 형편에 맞게 고쳐 쓸 곳이 더러 있었으나 초판의 정신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뜻하는 바가 옛것을 상고(詳考)하며 오늘을 반성해 보자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어디까지나 할아버지가 자기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얘기입니다. 혹 어긋나는 곳이 있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2018. 정월
한남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