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은 현대가 객관적 실증과학의 의미기반인 생활세계를 망각한 학문(인식)의 위기뿐 아니라, 인격의 주체인 자아가 매몰된 인간성(가치관)의 위기에도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이때 마주하는 것은 이 위기를 불가피한 재난이나 암울한 운명으로 간주해 이성을 적대시하는 회의적 비합리주의로 전락하는 길과 이 위기를 궁극적으로 극복할 이성의 영웅주의(Heroismus der Vernunft)로 재생하는 길이다. 어느 길을 걸어도 하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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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어 이전에 감각되는 지각을 분석하고, 주관적 속견의 권리를 복원하고, 생활세계의 심층구조로 선험적 주관성, 즉 자기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부단히 새롭게 형성해나갈 인격적 주체로서의 선험적 자아를 해명하고 그 당위성을 역설한 후설 현상학은 이제까지 어둠에 가려져 은폐된 곳을 밝힌, 따라서 ‘애매성의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여명의 철학’이다. 그리고 과거의 철학들이 당연하게 간주한 것 자체를 문제 삼아 그 근원을 캐물은 ‘철학 가운데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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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후설 현상학 전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는 선험적 환원과 그 영역을 이해하지 못해 맹목적으로 비난했던 문외한은 물론 자아보다 타자의 우선성과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레비나스, 생활세계와 상호주관성의 역사성과 사회성에 근거해 민속 방법론(ethnomethodology)을 전개한 슈츠 등 가까운 제자조차, 심지어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 행위로 이루어진 생활세계의 도식화(圖式化)와 식민지화(植民地化)를 비판한 하버마스, 의사소통과 공감을 통한 정신상담 병리학을 개척한 빈스방거(L. Binswanger), 블랑켄부르크(W. Blankenburg)도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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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철저하게 나의 장(場)에 머물러 있지만, 이 장은 감정 이입에 의해 다수의 완결된 의식의 흐름(이것을 자아의식이라 부른다)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이 의식의 흐름은 감정이입의 동기부여 연관을 통해 ‘나의’ 의식의 흐름과 연결되고 서로 그렇게 결합되거나 결합될 수도 있다. 이러한 연결은 그 의미상 결코 실재적 연결이 아니라, 감정을 이입하는 정립을 통한 독특하고 유일한 연결이다. ‘분리된’ 의식은 의사소통(Kommunikation)의 가능성에 지배받으며, 이 의사소통은 신체에 대한 지각과 여기에서 발산하는 동기부여의 방법에서 더 상세하게 기술해야 할 방식으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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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내가 타자의 자아, 타자의 의식을 재생산으로 표상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나의 자아, 나의 의식과 유사하게 표상하며, 심지어 내가 타자의 자아에 동일한 의식의 내용과 동일한 경험적 가능성을 배분할 때 그것을 나 자신의 것과 동일하게 확인하며 동일하게 간주함으로써 나의 것으로 옮겨놓는다. 여기에서 다시 무한한 존재에서 생각해보면, ‘순수 의식은 두 번 존재할 수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모든 신체성과 경험적 자아의 구성은 도외시하고, 동일한 자아가 두 번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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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내가 나의 신체로 타자의 신체 대신 그에 상응하는 공간의 위치에 있었다면 바로 그렇게 지닐 수도 있을 나타남을 지닌, 나에게 주어진 나타남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가능한 나타남이지만, 나는 이 동일한 실제의 나타남의 주관으로서 타인을 정립한다.
내가 이전에 타자가 있는 그곳으로 갈 수 있었고 타인이 지금 지니는 이 나타남을 그런데 지금 지닐 수 있던 한, 그것은 본래 나에게 단지 가능한 나타남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타나는 관련된 사물이 정지하고 변화하지 않은 경우에만 [타인과] 동일한 나타남을 얻지만, 이것 역시 그 현존재가 그 후에 나타나는 시점에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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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원초성을 넘어서는 더 높은 등급의 지향적 간접성에 근본성격은 무엇인가? 따라서 감정이입을 부각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모나드의 구체적 현재는 다른 모나드의 구체적 ‘함께 있는 현재’ (Mitgegenwart)를 어떻게 정립할 수 있는가? 어떤 원초성은 두 번째 원초성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는가? 요컨대 모든 것은 원초성이라는 개념과 이 속에 밝혀지는 ‘타자’의 개념, 즉 단순한 상징적 지시도 아니고 단순한 현전화도 아닌-자신의 것에 대한 현전화일 수도 없는-간접성인 타자에 대한 의식의 간접성이라는 개념에 달려있 다. 이것들 가운데 무엇이 처음에 바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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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에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할 어려움은 새로운 태도가 자연적 태도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적 태도에서 나에게 단적으로 타당한 우주인 세계는 가령 나에게 타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가령 적어도 의심받지 않고 자연적인 말의 의미에서 의문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원초성으로의 전환과 원초적으로 경험하고 판단하며 인식하는 삶의 순수한 활동은 작업수행이며, 나의 동일한 자아의 활동이다. 이 자아는 자연적으로 살아가며, 자연적 방식으로 세계를 타당하게 지니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러한 세계의 인간으로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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