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후반 인생을 맞아 이미 원하던 일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찾아보니 또 있었다. 그래서 인생명함 목록에 ‘훌쩍, 제주(2019년 가을부터)’라는 것도 써 넣었다. 그랬더니 나도 모르게 제주행 항공권을 예약하고, 숙소를 찾고, 떠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인생명함을 만들고 난 뒤 나는 자연스럽게 제주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었고, 숙소를 찾고 있었다. 마음에 쏙 드는 곳이 나타나 숙박료를 문의했지만 그때만 해도 가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것이라 마음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중에 불쑥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숙소를 예약하고, 항공권을 알아보았다. 난 이것이 인생명함의 힘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생명함은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을 표지로 해서 4면으로 만들었는데 ‘눈이 부시게’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인생명함은 앞으로 걸어갈 삶의 이정표로서 내 가치와 방향이 담겨 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문장을 새겨 넣었다.
- 후반 인생은, ‘나와 함께’, ‘나답게’, ‘나를 위해’
- 감동과 즐거움으로 나를 채우고, 그 가치를 세상에 알린다.
- 느리게, 풍요롭게
‘제주’는 바로 이러한 내용들을 실현시켜줄 최적의 장소였다.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첫발을 내딛는 날로서는 11월 11일 하루면 충분했다.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따로 돌아다닐 곳도 알아보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는 ‘책방과 올레길이 있으니 됐다!’면서 떠날 동기가 생겼지만, 이때만큼은 휴식과 함께 나와 마주하는 의식을 치르자면서 다른 욕심을 내려놓았다.
--- p.19~20
큰 아이 소풍 때 쓰레기 줍던 딸 친구 엄마, 산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던 사람, 길거리에 버린 쓰레기를 주워가던 남자, 그리고 환한 얼굴로 쓰레기를 주워가며 산을 오르던 청년, 심지어 바다의 쓰레기를 줍는 광고마저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난 일도 선명하게 기억되고, 최근 본 그들의 모습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냥 마음속에 들어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부끄러움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충만해지고 환해지는 기분을 느끼게도 했다. 공통점은 모두 큰 감동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쉬워 보이는 일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작지만 큰 파동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나도 집게를 샀다. 덕분에 많은 즐거움을 주는 오솔길에게 조금이라도 답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이제 들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집게를 사두고 바로 들고 나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산책을 하면서 주워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쓰레기봉지와 함께 들고 나간다. 무슨 일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용기내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 p.122~123
세 번째 책을 쓰고 있는 지금, 불안감인지 긴장감인지가 나를 흔든다. 내가 풀어내고 있는 이 이야기들이 과연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힘이 있는가 하고 말이다. 이건 매번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몇 번 더 찾아오고 더 커질 것이다. 1차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나서 피드백을 받을 때까지다. 2차는 파일 속에 갇혀 있던 글이 종이에 인쇄되고 멋진 표지로 묶여, 세상 밖으로 막나와 독자들에게 넘어갔을 때이다. 2차의 긴장감은 첫 리뷰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진다. 다행히 긍정적인 리뷰가 몇 편 이어진다면 불안감이나 긴장감은 일시에 사라질 것이다.
이런 불안감을 무릅쓰고도 책을 내자는 욕구에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품어온 꿈이기에 의심조차 않는 것에서 비롯된 힘인지도 모른다. 어떤 일을 하든 그 목적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활 철학마저도 사라지게 하는 힘이다. 책을 엮는 것은 흠모하는 산을 오르는 일이며,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고 싶다는 욕구이다. 그러므로 출간을 계속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면서, 내 글이 책으로써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한 언밸런스 게임 속에 있다. 그래서 이번 책도 “인생, 참 맛있다!”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을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한 사람이라도 내 책을 만난 뒤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찾았으면 좋겠다. 혼자의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 그 속에서 그윽한 자신의 내면 풍경을 만나 맛있는 인생을 살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남은 인생 맛있게 살면서, 맛있는 글 계속 쓰고 싶다. 글은 곧 그 사람의 삶이니까.
--- p.256~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