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새벽은 내게 기쁨도 슬픔도 기다림도 사랑도 외로움도 걱정도 근심도 미움도
정치도, 경제도, 물론 시 따위는 생각 안 나, 내가 사랑하는 우리나라도
착한 국민들도 그땐 없어
새벽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텅 빈 우주 속에 생각 없이
떠도는 별, 그냥 아름다울 뿐인 별 같아
부정하고 불편하고 욕하고, 열 받고 수긍하고 긍정하고 수정하고 수용할 것도 없어
나는 어둔 땅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을 때가 많아
나무들이 어둠 속에 그렇게 고요하고, 나와 같이 서 있어
(…)
아무 생각이 안 나, 새벽이 아름다운 것은 생각이 안 난다는 거야
눈에 보이고 몸에 닿고 귀를 찾아오는 것이 다야
다 마음 밖에서 머물러 버려
텅 비어 있어
나를 때리면 텅텅 타악기 소리가 날 것 같아
서재 문을 따고 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아 이렇게 말할 때도 있어
달빛이 부서지는 저 서정의 강물을 누가 내게 주었는가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어
--- p.26~29, 김용택 「이 글은 시가 아닙니다 나의 새벽입니다」 중에서
저만치라는 거리는 꽃과 나와의 거리입니다. 내가 꽃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거리입니다. 꽃을 꽃으로 존재하게 하는 거리입니다. 꽃을 소유하고자 하는 거리가 아닙니다. 욕망의 거리는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꽃을 꽃으로 존재하게 하면서 사랑하는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습니다. ‘저만치’의 거리입니다. 그 꽃이 사랑스럽게 내 앞에 있는 거리. 꽃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리. 그런 거리입니다.
--- p.44~45, 도종환 「꽃과 나의 빈빈한 거리」 중에서
그에게 나는 두 가지를 물었다.
“왜 늪이 이렇게 넓은데 그물을 집 주변에만 치느냐? 두 배로 치면 두 배의 수입을 거둘 거 아닌가?”
그는 내게 되물었다.
“왜? 이것만으로도 먹고살기 충분한데.”
그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고 친구들과 즐길 시간이었다. 부족한 시간을 벌어야지 남아도는 돈을 왜 벌어? 그 순간 훙의 등에서 날개가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 p.61~62, 방현석 「날개를 감춘 사람들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눈에 띄는 대로 가을에 씨앗을 여럿 받았다. 남의 밭에서 부추 씨앗 한 봉투, 강원도 고개를 넘다가 코스모스 씨앗 한 봉투, 내성천 강변에서 금계국 씨앗 한 봉투, 예천여고 꽃밭에서 금잔화 씨앗 한 봉투, 나팔꽃이며 맨드라미며 봉숭아 씨앗 한 봉투…… 스무 가지가 넘는 것 같다. 씨앗을 심는다고 해서 모두 아름다운 꽃이 피고 좋은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때를 잘 맞춰야 한다. 씨앗 위에 덮이는 흙의 두께와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 데 필요한 물과 햇볕의 양과 북을 돋워 줘야 할 시기와…….
--- p.72, 안도현 「때를 맞추는 일」 중에서
모든 음악에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즐거움(혹은 감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 많은 음악이 있다. 나의 음악 감수성은, 나의 음악에 대한 동경과 작곡가가 되고자 했던 노력은 그 즐거움(혹은 감동)을 주는 음악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에 의해서 키워진 것이며 그것을 구현해 보고자 했던 시도의 결과였다.
--- p.81, 이건용 「도전과 스밈과 골디락스」 중에서
골디락스의 ‘죽’은 어떻게 보면, 저에게는 33년 동안 매일 기적을 경험하게 한 ‘밥’과 같습니다. 곰의 집에 차려진 접시에 담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죽……. 하루 한 끼 밥을 얻어먹기 위해 눈만 뜨면 “먹어야 살지” 하며 찾아오시는 청량리 어르신들과 노숙인들에게는 밥 짓는 자원봉사자들의 눈물과 정성이 바로 ‘골디락스’였을 것입니다.
--- p.103, 최일도 「따뜻한 밥그릇과 식은 도시락과 빈 그릇 사이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