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건 에스페란토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처음 언어를 발표했던 목적대로 에스페란토가 영어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고 해도, 자리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 특정 언어가 다른 언어 위에서 군림하는 상황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근본적인 문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모든 것들의 폐해죠.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모조리 부정하며 출발하지만, 결국에는 자신도 그 거대한 환경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나비는 이상을 품지 않았죠. 당신은 현실주의자였어요. 거창한 명분이나 혁명 없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기 위해 자기 주변의 작은 이야기를 가꾸어 나가는 데 공을 들였으니까. 하지만 전 그러지 못했어요.
--- p.14
고미센가 방엔 낡은 소파가 하나 있어. 그건 엄청 크고 넓어서 오 평쯤 되는 동아리 방을 다 차지하고 앉았다.
“어느 집 거실에 가도 소파는 있잖아.”
고센방으로 나를 이끄는 선배들은 말했어.
“거기 서서 뭐 하냐, 와서 앉아. 그렇게 우릴 불러 모으잖아, 소파는. 집의 근간 같은 거지.”
그러나 이 근간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버려졌고, 태풍이 불어 도시 전체가 버려진 것 같던 날 술 취한 옛 선배들이 길거리에서 고센방까지 끌고 온 것이라 했다. 아직 가죽이 쓸 만하고, 분명히 사랑받고 산 소파 같다는 이유로……. 소파가 무슨 아이나 강아지야? 사랑받고 말고 하게. 등받이 전체가 고딕식 몰딩으로 둘러싸여 필요 이상으로 엄숙해 보이는 소파였어.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그러니까 필요하지 않아. 구식 가옥의 어둠침침한 거실에나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것이 방한용 에어캡으로 뒤덮인 동아리실의 시멘트벽을 두 면이나 차지하고 앉아있었거든. 그 덕에 흡사 소파의 집 같았다, 이곳은. 우리가 소파의 집에 초대된 것 같다고. 우리 방인데도. 투덜거리며 나는 소파에 주저앉았어. 쿰쿰한 냄새가 풀썩 끼쳐오고 얇고 축축한 가죽이 몸에 맞게 내려앉더라? 나쁘지 않은 기분. 먼지 묵은 냄새가 잠을 불러오는데…… 나는 단박에, 왜 항상 고센방에는 사람들이 있는지, 빠르고, 혼혼하게, 깨달아버렸어.
--- pp.23-24
나는 유령이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엄마에게 혼나기 전에 죽어버리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책가방 속에 책을 거칠게 쑤셔 넣었다. 뒷자리 새미가 내 등을 쿡 찌르며 말했다.
“혜령아, 내 맘 알지? 안 삐졌지?”
새미의 말끝에 다른 친구들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내 맘도 알지? 혜빈이보다 너랑 더 친한 거 알지?”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은 내 표정을 보고 안심한 듯 교실을 빠져나갔다. 복도에서 역시 혜령이는 뒤끝이 없어서 좋다는 친구들의 대화가 들렸다. 한숨을 쉬려는데 교실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새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 비 올 수도 있대. 비 오면 학교에 유령 나온다는 얘기 들었지? 얼른 집 가!”
--- p.69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나도 모르게 든 습관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은하가 없다. 은하에게서 온 연락도 없고. 그냥 회색선을 밟아버릴까. 바닥을 내려 보자 기름때가 묻은 우주충한 회색 콘크리트가 보였다. 꺼름칙했다. 으, 싫다. 싫어. 깨끗하고 새하얀 선만 밟자. 아니면, 그래, 내기를 걸자. 은하가 있을 때처럼 내기를 거는 거다. 하얀 선만 밟는 행운의 징크스가 이루어지면 은하가 나에게 먼저 어디로 갔냐고 연락을 할 거다. 맨날 나에게 바보 같다고 놀리는 한수연이랑은 헤어지고 나랑 또 다시 단짝으로 다니는 거다. 선생님이 내 일기에 ‘은하도 그렇게 생각하고말고.’라고 여전처럼 적어주시겠지. 그렇게 상상하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거침없이 반대쪽 발도 내밀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하얀 선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 p.98
롯데월드에서 나타나는 스토리텔링은 늘 한결같았다. 모험과 신비, 어릴 적 누구나 꿈꿔봤을 다른 나라로의 모험과 동화 속 환상의 세계. 누구나 롯데월드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치 정글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피라미드의 저주를 피해 도망칠 때의 긴박감을, 저 멀리 보이는 성의 모습에 두근거렸던 감각을 기억할 것이다. 늘 변화하는 존재인 인간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갖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롯데월드는 그런 기본적인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보다 구체화시켜 방문객들로 하여금 정말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게 하였다.
--- pp.111-112
시간 속에서는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다는 말을 잊지 않았을 거야.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득했니? 아무리 힘든 고난의 연속일지라도 지나고 나면 그 속에서 하나라도 얻지 않던? 한 뼘 성장해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만큼 뿌듯한 일도 없을 테지. 이 편지를 쓰는 지금으로부터 3년 후의 네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아주 궁금하구나.
--- p.121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일 달라지는 공연을 보기 위해 같은 극을 여러 번 찾는다. 이처럼 하나의 극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행위를 ‘회전문을 돈다’고 표현한다. 회전문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계속 뱅글뱅글 도는 모습에 빗댄 것이다.
인터파크에서 2018년 1월부터 9월까지 뮤지컬 공연 예매자를 조사한 결과, 약 60만 명의 예매자 중 같은 공연을 3회 이상 반복해서 예매한 인원이 3만 8천 명으로 집계되었다. 전체 뮤지컬 관람 인원의 약 6%가량이다. 그중 10명 중 1명은 한 공연을 10회 이상 재관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계자에 의하면 30회 이상 같은 공연을 본 관객도 150여 명에 달했으며 동일한 작품을 가장 많이 본 관객은 총 120회 관람했다고 한다.
--- p.131
혼자족이 지향하는 바는 결코 ‘혼자 살다가 혼자 가는 세상’이 아니다. 사회를 이루는 근간은 무리가 아니라 인간 개개인이라는 아주 당연한 명제를 인정받길 원한다. 개인의 다양성과 개인의 영역을 폭력적으로 집단 속에 포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신의 생활을 통해 주장한다. 그렇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진정으로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주체가 되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촛불을 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스스로 ‘혼자인 나’를 선택하고 주체가 되었던 기억은 원동력이다. 다다르는 곳이 어디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은 앞뿐이다. 주체가 되어 나아가고 멈추지 않는 수밖에 없다. 그 끝에 혼자인 나와 혼자인 당신, 그리고 우리가 서 있길 빌며.
--- p.162
영화는 ‘프레디 머큐리’가 ‘퀸’이라는 그룹을 시작하기 전부터 보여준다. 공항에서 짐 나르는 일을 하던 ‘프레디 머큐리’의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 그는 자신의 출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바꾼 이름이 ‘프레디 머큐리’이다. 타지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차별 받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파로크 불사라’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된 그는 ‘프레디 머큐리’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의 화려한 면모만을 다루지 않는다. 영화는 스타 ‘프레디 머큐리’의 이면을 담아낸다.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에너지 넘치고 활발한 사람이지만 무대에서 내려온 그의 모습은 무대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외로워한다. 그의 외로움은 그가 이방인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 pp.165-166
이렇듯 과거 돌란이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가족’이라는 의미에 접근하려 했다면 『단지 세상의 끝』(2016)에서는 이제 가족 그 자체로 접근한다. 하지만 분위기는 앞선 두 작품이 보여준 것과는 사뭇 다르다. 지난 영화에서의 애틋함, 사랑과 같은 따스한 분위기와는 달리 이 작품은 좀 더 냉소적이고 무의미한 시선으로 가족이라는 대상을 그린다. 그리고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진정 가족이란 그러한 ‘이야기(우리가 알고 있는)’인가?
--- p.179
『미쓰백』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예상 가능한 구조였고, 결말 또한 그랬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스토리의 전개보다는 복선과 대사, 영화 전반적인 분위기를 통해 피해자이지만 전과자가 된 ‘미쓰백’과 가정에서 폭력과 억압을 받는 어린 아이 ‘김지은’,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갖는 감정들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관객들은 고스란히 눈물로 보여준다.
--- p.201
언젠가 스물둘을 살았던 누군가가 스물둘인 내게 건네준 이미 떠나버린 기차표처럼, 혹은 이게 정답이라며 쥐여준 정답지가 오래전에 끝난 시험의 정답지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사회적으로 절대적인데,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 앞에 수식어를 각자 붙일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유연하지 못하다. 나이라는 게 공장에서 찍어내듯 정량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언제, 누가, 어디에서 그 숫자를 들고 있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진다. 그런데 가끔 단지 그 숫자를 과거에 쥐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치는 보다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경우가 있다.
“나 때는 말이야.”
--- pp.2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