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면서 내가 왜 전에 없던 이런 방식으로 급하게 밥을 먹는지,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은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특출나게 잘하는 게 없어 회사원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종일 가만히 앉아서 특별할 것도 없는 전문적일 것도 없는 '일반적'인 일을 하면서 손가락만을 놀릴 뿐이지만. 그래도 내가 오늘 어떤 현장에서, 어떤 전투에서, 어떤 정글에서, 내 몫을 해내고 이렇게 돌아왔다고. 그래서 몹시 허기가 지다고 말이다.
--- p.71, 장류진(회사원 겸 소설가), 「구내식당 석식을 게걸스럽게 먹게 된 이유에 대하여」
불행인지 다행인지 헷갈리는 것들이 있다. 글을 누군가랑 같이 쓸 수 없다는 사실이 그렇다. 피아노 연탄곡을 치듯 키보드에 손 네 개를 올려서 함께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글쓰기는 참으로 혼자의 일이다. 남이 정한 출퇴근 시간이 없다는 것 또한 좋은 건지 아닌지 헷갈린다. 프리랜서 작가 생활의 달콤한 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할 일의 양이 변하지는 않으므로 어쨌든 스스로를 노동 모드로 엄격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비슷하다.
--- p.75, 이슬아(연재노동자), 「혼자가 되는 책상」
책은 그렇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 또한 내게 몸으로 다시금 쓰게 한 듯하다. 만든 책이라는 어제에서 만들고 있는 책이라는 오늘을 지나 만들 책이라는 내일에 이르기까지 인생이라는 하루살이의 정의를 다시 내려준 책, 그 책이라는 만져짐은 나라는 사람의 탐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유일무이한 물성이라 언제고 나를 그 앞에 무릎 꿇게 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곤 하다.
--- p.83, 김민정(시인, 편집자), 「나는 ‘탐’이라는 글자의 자리에 ‘책’이라는 글자를 묻으면서」
가끔 일을 한다는 것이 삼각형 모양의 트램펄린을 타고 있는 것 같다고 상상하게 될 때가 있다. 시간과 꿈과 돈이라는 세 가지 기둥에 그물을 걸고 그 한가운데에서 올라갔다 내려오고 다시 올라갔다 내려가는 운동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 기둥들이 튼튼하고 균형을 잘 이루느냐에 따라 얼마나 안전하게, 재미있게, 그리고 높이 뛸 수 있느냐가 달라지겠지만 현실에서 세 가지 모두 균일하게 훌륭한 경우는 드물기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서로 다른 트램펄린으로 이동해간다.
--- p.95, 김동신(디자이너), 「7시간을 위하여」
24시간 영업점에서 비추는 조명과 밤이 익숙한 몇몇이 밝힌 불빛만이 거리에 흔들리며 누군가의 존재를 희미하게 알려온다. 밤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탈 것에 의지해 빛을 발하며 이동한다. 소리를 허락하지 않는 듯한 일본의 조용한 밤 속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것은 어둠을 뚫고 달리는 알 수 없는 빛이다. 달빛과 섞인 인공의 빛은 인간이 없는 도시의 적막한 풍경에 궤적을 남긴다.
--- p.96, 노기훈(사진가), 「달과 빛」 작가 노트
온카발로의 오페라《팔리아치》의 테마곡〈의상을 입어라〉는 유랑극단 배우 카니오가 아내의 부정을 목격한 직후에 슬픔과 격정에 휩싸여 부르는 아리아이다.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 의상을 입어라. 관객은 돈을 내고 왔으니 웃고 싶어한다. 웃어라. 웃어라 광대여! 슬픔과 고통을 감추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관객들 앞에서 희극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처럼 다양한 노동형태의 ‘의상을 입고’ 자본가/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며 수행하는 노동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 되었다.
--- p.108, 주황(사진가), 「의상을 입어라」 작가 노트
과연 사진은 금융자본주의 시대가 낳은 여파만을 뒤쫓는 ‘후사(後事)’의 매체여야만 할까. 사진은 금융엘리트의 도덕적 해이와 사기 행각의 피해자가 된 시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담아내는 데 만족해야 하는 기록인가. 사진가의 의도와 다르게 금융위기 속 서민의 일상을 다뤄온 포토저널리즘은 한편으론 특정한 참상만을 이를 보는 관계자와 일반인을 상대로 수출해버린 셈 아닐까. 이 같은 질문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좋아하거나 직접 찍고 싶은 당신의 오랜 고충을 끄집어내고 만다.
--- p.125, 김신식(감정사회학 연구자), 「승인」
밤의 버스를 찍으면서 닉은 그것이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는 기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오후 다섯 시에 사무실에서 일어나 가족이 있는 집으로 향한다. 사무실과 집은 전혀 다른 이들이 모여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곳이고, 당신 역시 양쪽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까 밤의 버스는 에일리언이 타는 우주선이거나, 아니면 망자들의 연옥과도 같은 장소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잠깐 머무르는 그런 곳.
--- p.143, 김현호(사진비평가), 「낮의 사무실에서 밤의 버스로」
권경환 작가와 저녁을 먹고 작업실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어제 친구들과 술마시며 나눈 얘기라며 말했다. “어제 친구들이랑 모여서 술마시다 나온 얘긴데, 작가들은 잘 되봤자, 빛 좋은 개살구라고… 그래도 다 같은 개살구라면 빛이라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요?”
--- p.154, 김희정(사진가), 「1년, 개살구, 작업실,」
내레이터를 통해 하나의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정작 그 사진 자체는 보이지 않고 잠재적인 채로 있다. 마침내 이 사진이 스크린에 보이고 현실화될 때, 앞서 들은 이야기는 우리의 기억 속에 일종의 잔상(afterimage)처럼 남아 그 사진과 중첩된다. 그리고 이 사진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또 다른 사진에 얽힌 이야기와 중첩된다. 이렇게 해서, 언어에서, 이미지에서, 언어와 이미지 사이에서,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간극이 복원된다. 그리고 영화란 언제나 이러한 간극을 통해서만 출현하고 또 거기에서만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 p.229, 유운성(영화평론가), 「도래할 것을 향한 노스탤지어」
한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를 다른 사람의 눈에 온전히 전달하기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눈에 무엇이 비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시차를 두고 나란히 앉아 같은 빛을 보는데서 시작되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그런 명령에서 이탈함으로써 개방되는 가능성의 여지다. 내가 당신이 아닐 수 있고, 우리가 서로 다른 곳에 설 수 있으며, 그래서 각자가 본 빛을 나눠가질 수 있다는 것. 합성된 황혼의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런 비현실적 빛깔의 꿈이다.
--- p.241,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합성된 황혼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