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성이 신체의 표현 및 기록을 위해 촬영자를 경유해 사진에 도착할 때,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사진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피해나 어려움이 있었을 경우 위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작금의 여러 노력과 시도 이전에, 오랫동안 예술 안팎에서 여성과 여성의 몸은 구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 인격체가 아닌 무언가로 소비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는 여성들 자신에게도 일면 습관처럼 배어있습니다. 즉 ① 피사체가 의도하지 않은 사진이 찍힐 가능성은 높은데, ② 관찰자의 눈에는 피사체의 욕망과 촬영자의 욕망이 쉬이 구분되지 않는데다 ③ 심지어는 피사체가 이런 이미지를 원했던 것처럼 보이고, ④ 복사 및 재배포되는 건 순식간이며 ⑤ 영구 삭제는 불가능에 가깝고, ⑥ 피사체가 촬영자에게 항의하기가 어려우니 타인의 눈에는 모든 게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데 ⑦ 여기에 그 찍힌 사진이라는 게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여성이 담겨있는 게 대부분이라 ⑧ ‘사람’에게라면 하지 않을 평가와 끔찍한 댓글이 사진을 뒤덮습니다. 이 과정은 결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피사체의 실제 삶까지 위협하며, 그 삶을 사람의 삶이 아닌 것으로 끌어 내리곤 합니다.
--- p.9, 이옥토 〈카메라 뒤를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몸은 단 한 번도 나의 것인 적이 없었다.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너무 무거워도, 너무 가벼워도, 너무 넓어도, 너무 좁아도, 너무 얇아도, 너무 두꺼워도 안됐다. 어릴 적 나는 다른 세상 속의 나를 하루 종일 머릿속으로 그렸다. 저 모든 조건을 만족시킨 “이상적인” 몸을 한 여자 아이의 삶을 늘 상상했다. 아침 8시 30분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저녁 5시 40분에 저녁 식사를 하는 고칠 것이 없는 몸을 한 여자 아이의 삶. 상상 속의 나는 늘 행복했고 거울 속의 나는 늘 불행했다.
--- p.55, 신화용 〈몸과 몸 사이, 고백록〉
사진사와 모델들 사이에 생기는 문제는 구조적이다. 사진사에게 자연스럽게 배당되는 권리가 일단 광범위하다. 셔터를 누를 때만이 아니라, 원본을 확인할 권리가 ‘사진사 고유의 영역’이라는 명분 아래 모델에겐 자주 허락되지 않는다. 이를 받아들이는 모델도 있지만, 자신의 어떤 모습이 사진사의 하드 디스크에 저장돼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건 모델들에게 때론 불안이고 공포다. 찍은 사진 가운데 어떤 사진을 추려낼지, 어떤 사진을 게시할지 결정할 권리도 사진사에게 우선으로 주어진다. 실제로 다수의 모델이 동의 없이 자신의 사진이 온라인상에 게재되는 일을 흔하게 당했다고 밝혔고, 이런 상황에 대한 불편감과 당혹감을 드러냈다. 이러다 보니 사진을 없애 달라, 삭제해달라는 요청은 모델과 사진사 사이의 고전적 다툼 소재다. 찍힌 사진 중 어떤 사진을 고를지는 모델에게도 민감한 문제지만 자신이 돈을 지불한 촬영이 아닌 이상, 모델이 셀렉팅에서 자주 배제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 p.68, 김인정 〈나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외모를 통해 정체성을 의심하는 발언은 일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폭력이다. “아무리 봐도 이성애자인데 네가 어딜 봐서 게이(레즈비언)냐?”라는 말은 퀴어에게 상당히 익숙한 발언이다. 본인이 직접 들었거나 직접 듣지 않았다고 해도 주변에 저런 말을 직접 들은 친구가 존재한다. 그리하여 퀴어의 어느 한 범주로, 혹은 퀴어로 커밍아웃하는 일은 언제나 그렇게 생긴 외모나 이미지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물론 그 외모나 이미지의 근거는 기껏해야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모습이다. 게이라면 패션 센스가 뛰어나야 하며, 트랜스여성이라면 천상여자여야 하고 트랜스남성이라면 상남자여야 하는 식이다.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을 때 정체성은 의심받는다. 이 의심은 이성애중심 사회가 퀴어를 관리, 통제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규범성의 폭력이다.
--- p.74, 루인 〈비규범성은 인식될 수 있을까?〉
당신은 성 정체성이란 성적인 욕망을 다루면서 그 욕망에 대처하는 개인들의 반응 양식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 부인되거나 금지된 대상을 욕망하는 자들은 위반이나 좌절로서의 충동과 욕정에 더 감염된다는 것, 섹스에서 지복의 만족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둑하거나 밝거나 다감하거나 잔인한 이율배반적인 흐름들이 뒤엉켜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러한 정동이 바로 우울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또 그 우울함에 깃든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 당신은 명석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어떤 위험도 감수하게 만드는 터무니없는 용기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는 것을, 당신은 직접 베이징에서 듣고 보고 알았겠지요. 그래서 당신의 사진은 더욱 신랄하고 당신의 우울함은 나에게로 옮겨집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우울함에 전이되며 공동체를 이루어 왔으니, 그런 우울함을 인계받고 그 속에 머무는 것은 매우 그럴 듯한 일이지요. 이따금 당신의 눈부시게 밝은 우울한 욕망의 나체들을 찾아보겠습니다.
--- p.134, 서동진 〈이제 당신의 우울은 내게로 옮겨집니다, 렌 항(任航)에게〉
정상성 범주라는 사회적 통념은 그동안 우리의 관계와 삶을 하나의 방식으로만 강제해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정상성 범주에서 벗어나 각자의 다양한 성적 취향과 지향을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나는 성적으로든, 감정이나 정서적으로든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고자 관계를 이루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친밀한 순간에 주목하는 것이다.
--- p.161, 앤 소피 기예, 〈Together〉 작가 노트
난 그냥 나를 알아. 이름이나 서류 따윈 중요하지 않아. 나는 그저 내 자신일 뿐이지. 스스로 자신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그것만큼 세상에서 멋진 일은 없어. 내가 누구인지 누군가에게 증명할 필요도 없어. 내가 알잖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내 알 바가 아니고. 물론, 아주 어려서부터 가족을 잃을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날 거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 하지만, 만약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스스로 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게 다야. 적어도 스스로를 속이며 불행한 삶을 살지는 않을 테니까. 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속여? 말도 안 돼.
--- p.211, 제스 듀건 〈To Survive on This Sh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