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보상을 기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신다. 그것 역시 핵심이다. 단순히 하나님을 더 아는 것 자체가 충분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보상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무엇일지 기도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겉과 속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삶을 살라고 초대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그런 삶은 겉과 속 모두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때만 가능하다. ---「1장 ‘예수님의 가르침’, p. 21」중에서
우리가 기도하려고 애쓰는 그 순간, 그리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 바로 성령께서 가장 분명하게 일하시는 때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정돈된 언어(이것은 안도감을 주겠지만 우리는 아직 기도에서 안도감을 느낄 준비가 안 되었기에)가 아닌 아직은 언어가 될 수 없는 말, 곧 탄식을 발하신다. 그것은 기도 너머의 기도, 인간의 시각이나 지식이 닿을 수 없는 차갑고 어두운 심연으로 뛰어드는 기도다.
그러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이해할 수 없는 기도란 없다. 바울이 그리는 (세상과 교회뿐 아니라) 하나님의 그림에서 우리는 초월적인 창조자가 자신의 백성들 마음에 거하는 영과 지속적으로 교통하고 계심을 발견한다. 영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이해하실 수 있다. 세상의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 편히 쉴 수 없는 영이 세상의 창조자 앞에서 뒤척거릴 때, 우리에게는 오직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로만 들리는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듣고 응답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이 된다. ---「2장 ‘바울의 가르침’, p. 45.」중에서
그는 기도하고 있다! 거기에는 기도하는 그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다. 당신이 빨간 물체를 볼 때 그것이 내가 본 빨간색과 정확히 똑같은 색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신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것이 오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햄릿은 클라우디우스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멈추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와는 완전히 다른, 동일하게 수수께끼와 책략 그리고 음모에 휩싸였지만 그와는 달리 모든 것에서 결백한 왕이 기도하고 계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 역시 잠시 멈추고 기다려야 하는 자리에 와 있음을, 그리고 아마 우리도 그 기도에 조용히 동참해야 함을 발견한다. ---「4장 ‘예수님의 기도’, p. 90-91.」중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는 사람들이 마주하게 될 어떤 ‘권세(자)’와도 차별되며, 그 어떤 능력보다 가장 우월한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권세에 근거해 이제 온 우주를 다스리는 보좌에 오르셨다. 뿐만 아니라 부활절에 나타났으며 이제는 예수님께 부여된 그 동일한 권세를 우리도 매일 사용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의 중심에는 그들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의 열망이 있다.
바울의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이런 능력이 실제로 존재하며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무 많다. 그들은 친구의 망원경을 구경하던 내 모습 같다. 그 강력한 망원경을 직접 들여다보기 전까지, 나는 기에 뭐가 있는지 보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별 능력이 없는 것 같아’ ‘나는 세상에서 예수님이 행하고 계신 능력이 잘 보이질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바울의 이 기도가 필요하다. ---「5장 ‘바울의 기도’, p. 149-150.」중에서
평소에도 바울은 그들을 위해 늘 기도했지만, 그들의 도움은 바울이 더욱 확신에 차서 기도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인생을 변화시키는 일을 행할 때, 그것이 그저 한때 반짝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종교적 경험’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신앙, 왕이신 그분께 진정한 충성심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복음을 통해 일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언제나 완성하신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들, 특히 고린도전서는 많은 문제와 씨름한다. 그러나 여전히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한다. 구원 역사의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완수하실 것이다. ---「5장 ‘바울의 기도’, p. 159.」중에서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기반을 두는 기도란,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승리의 부활이 보여 주는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의 주권적인 사랑에 의지하는 것을 배워 가는 기도다. 기도란 가장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의 탐험이다. 우리가 그 탐험을 하는 이유는 그저 거기에 머물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그런 것도 따라오겠지만), 그의 치유하시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교회와 세상을 그분 앞으로 데려오기 위함이다.
이런 하나님, 이런 주님을 인정하는 기도는 자신감이 자라가는 기도다. 만약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라면, 예수님이 진짜 이 세상의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이 하나님과 주님이 어떻게든 다른 신이나 군주들의 능력을 제칠 수 있기를 바라는 이들처럼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 위에 가장 뛰어나시며,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훨씬 이상으로 일하실 수 있는 분께 기도하는 것이기에(에베소서 3:20) 자신감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5장 ‘바울의 기도’, p. 172.」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