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무엇일까? 나 자신이 사랑을 한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특정한 문화적 시기, 어디에서나 감상적인 마음을 찾아내 숭배하는 문화적 시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의 동기가 된 요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사회가 아니었을까? 다른 문화와 시대에서라면 내가 그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을까.
--- 본문 중에서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구가 해결책을 발명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출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대개는 무의식적인] 요구, 사람의 출현에 선행하는 요구의 제 2 단계에 불과하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빚어내며, 우리의 욕망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구체화된다.
--- p.24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과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현재라고 부르는 조그만 오아시스에서 이 지친 짐승은 아의 나머지를 따라잡게 되었다.
--- p.272
24.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는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모두" 아주 완전해 보이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관된 전개, 안정된 인격, 고정된 방향, 주제의 통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환각을 통해서 상대방으로부터 그런 장점들을 만들어낸다. 나와 클로이의 관계에도 이런 것이 있지 않았을까? 즉 밖에서 보기에(상피 접촉 이전에) 그녀는 멋지게 균형이 잡혀 보이고, 분명하고 지속적인 인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그림 6.1). 그러나 성교 후에는 그녀가 취약하고, 무너지기 쉽고, 분산되어 있고, 궁색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것은 니체적인 자아, 단순한 행동들의 총합이 버틀러 주교(Joseph Butler, 1692-1752, 영국의 주교, 신학자, 저술가/역주)의 "본질적" 자아라는 관념에 애착을 가지고 성적으로 매력을 느낀 예가 아닐가? 그래서 클로이가 눈물을 흘린 뒤에 내 머릿속에서는 봅 딜런의 "나에게 부서지지 말라(오늘밤에)"는 유명한 노래 구절이 메아리쳤다.
25. 따라서 마르크스 주의자의 욕망의 대상이 된 사람은 불균형이 정상으로 보이는 영역에서 정확한 균형을 성취해야 한다. 지나친 연약성과 지나친 독립성 사이의 균형. 나는 클로이의 눈물에 겁을 집어 먹었다.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나 자신도 그녀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내 자신 안에서 생겨날까봐 두려워하는 의존성을 비난했다. 그러나 연약성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건, 독립성 역시 그 나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만한 냉정함 때문에 연인의 필요성을 부정해버리는 여자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클로이에게는 어려운 과제가 있었다. 나의 독립성을 위험에 빠뜨릴 만큼 연약해서는 안되고 동시에 나의 연약성을 부인할 만큼 독립적이어서도 안된다는 것.
26. 서양 사상에는 결국 사랑은 보답받을 수 없는, 일방적으로 사모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오래 되고 우울한 전통이 있다. 사랑이 보답받을수 없기 때문에 욕망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사랑은 방향일 뿐 공간은 아니다. 목표를 성취하면, '침대에서건 어떤 식으로건'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면 소진되어버린다. 12세기 프로방스의 음유시인들의 시는 모두 성교를 미루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인은 되풀이하여 남자의 간절한 제안을 거절하는 여자에게 탄식을 늘어놓는다. 4백 년 뒤의 몽테뉴 역시 무엇이 사랑을 자라나게 하느냐에 대해서 그 시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몽테뉴는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니 드 루주몽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이 정열을 강하게 물태우는 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욕망을 정의상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한정시켰다.
--- pp 81~82
"굉장한데. 내가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 동안 이걸 다 준비했다는 거야?"
"내가 누구처럼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지. 자, 식기 전에 먹자고."
"이런 걸 다 준비하다니 정말 좋은 사람이야."
"쓸데없는 소리."
"아니, 정말로. 나는 매일 이런 아침상을 받는 게 아니거든."
나는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는 않고, 내 손을 잡더니 잠시 꼭 쥐었다.
"그렇게 기분 좋아할 필요 없어. 이건 특별히 차리 게 아니었거든. 나는 주말마다 이렇게 먹는단 말이야."
나는 그녀 말이 거짓말임을 알았다. 그녀는 낭만적인 것을 비웃는 데다, 감상적인 것을 배격하는 데에,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고 거리감을 보이는 데에 약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반대였다. 이상주의적이고, 몽상적이고, 베풀려고 하고, 입으로는 질질 짜는 것이라고 배격하는 모든 것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 pp 70~71
"굉장한데. 내가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 동안 이걸 다 준비했다는 거야?"
"내가 누구처럼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지. 자, 식기 전에 먹자고."
"이런 걸 다 준비하다니 정말 좋은 사람이야."
"쓸데없는 소리."
"아니, 정말로. 나는 매일 이런 아침상을 받는 게 아니거든."
나는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는 않고, 내 손을 잡더니 잠시 꼭 쥐었다.
"그렇게 기분 좋아할 필요 없어. 이건 특별히 차리 게 아니었거든. 나는 주말마다 이렇게 먹는단 말이야."
나는 그녀 말이 거짓말임을 알았다. 그녀는 낭만적인 것을 비웃는 데다, 감상적인 것을 배격하는 데에,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고 거리감을 보이는 데에 약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반대였다. 이상주의적이고, 몽상적이고, 베풀려고 하고, 입으로는 질질 짜는 것이라고 배격하는 모든 것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 pp 7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