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엄장한 건축물로 장관을 이루던 그곳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고대 로마의 이교도들이 남긴 기념비와 흡사한, 그나마 띄엄띄엄 눈에 띄는 폐허뿐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벽과,기둥과,문틀의 잔해 위로는 인동덩굴이 기고 있었고 바닥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예전의 채마밭과 뜰은 어디에 있었는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 p.907,---pp.1-6
한동안 내가 그 수도원 살인 사건의 혐의자로 말라키아를 의중에 두었던 것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막상 이승을 뜨고 보니, 그가 어쩐지 채울 수 없는 욕망에 쫓기던 가엾은 존재, 할 말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겠지만 늘 당혹과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의미에서 흡사 수도사들이라는 쇠그릇 사이에 끼인 질그릇 같다는 생각도 했다.
--- p.782
특히 사랑이라는 병은 괴질이기는 하되 사랑 자체가 곧 치료의 수단이 된다는 이븐 하즘의 정의는 인상적이었다. 이븐 하즘에 따르면, 사랑이 괴질인 까닭은,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나는 그제서야, 그날 아침 내 눈에 보인 것들이 그렇게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까닭을 이해했다. 안치라 사람 바실리오에 따르면 사랑은 눈을 통해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오는 병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들뜨거나, 혼자 있거나, 혼자 있고 싶어하거나 공연한 심술을 부리거나 바로 이 심술 때문에 말수가 적어지거나 한다.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만나지 못 할 경우에는, 심한 자기 학대 증세를 보이면서 하루 종일 침상을 떠나지 않는데, 이 상사병 증세가 지나쳐 뇌가 영향을 받게 되면 정신을 잃거나 헛소리를 하게 된다는 대목에서는 겁이 덜컥 났다. 이 병이 악화되면 목숨을 앗을 수 있다는 대목도 꺼림칙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여자를 생각하다가 육체가 희생되어도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 pp.600~601
오늘날에 와서는 성자와 선지자들 까지도 신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철학자의 일자 일언이 바야흐로 세상의 형상을 바꾸어 놓기에 이르렀어요. 이 서책의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이 그어 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기어이 넘게 되고 말 것이오.
--- p. 737
서책이라는 것은 서책 자체의 내용도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책끼리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나는 사부님 말씀을 듣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문득 장서관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장서관이란, 수세기에 걸쳐 서책끼리의 음울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곳.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살아 있는 막강한 권력자, 만든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 남을 무한한 비밀의 보고인 셈이었다.
--- p.529
문서 사자실이 추워 손이 곱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 p.911
뒷 이야기이지만 수도원은 그 뒤로도 사흘 밤낮을 탔다. 불길을 잡아 보려던 마지막 노력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생존자들은, 수도원 건물 중에 지켜 낼수 있는 건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느님의 응징에 맞서 보려고 쳐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이 때는 그 엄장하던 건물이 모두 외벽뿐인 폐허로 남고, 교회가 빨아 들이 듯이종탑을 삼켜 버린 다음이었다. 우리가 그 수도원에 머문 지 이레째 되던 날의 일이었다. 몇 동이의 물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집회소와 수도원장 공관은 그날 아침까지도 타고 있었다.
--- p.뒷말 169
'내 일찍이 일렀듯이 나는 내가 세운 가정은 미리 언표하지 않는다. 니콜라의 말에 일리가 있기는 해. 흥미있는 대목도 많고...허나 내가 지금부터 가려는 길은 이와는 정반대 되는 길이야. 아니 어쩌면, 방향만 다를 뿐 한 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 말인데, 상자 속에 든 걸 보고 너무 기죽지 말아라. 나는 다른 교회나 수도원에서도 거룩한 십자가 조각을 많이 보았다. 모두가 진짜라면 우리 주님은 통나무 두 개를 걸쳐 만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아주 널찍한 숲속에서 돌아가신 모양이다.'
'아니, 사부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말이 그렇다는 것이야. 이곳에 있는 것보다 더 귀한 보물은 다른 데 얼마든지 있다. 내 어느 해 쾰른 성당에서 세례 요한의 두개골을 보았는데... 기가 막혀서...... 열 두어 살 먹은 아이의 두개골이더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께서는 연세가 훨씬 드신 다음에 처형당하지 않았습니까?'
'그 두개골은 또 다른 교회의 성보 상자에 들어 있을 테지......'
--- p.780-781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참으로 신심있는 자들이 지복을 누리는 광막한 사막으로 들어간다. 오래지 않아 동등과 부동이 존재하지 않는, 적막과 화합과 적멸의 나라인 하늘의 어둠에 든다. 이 심연에서는 나의 영혼 역시 무화하여 동등함과 부동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심연에서는 모든 불화가 사함을 얻는다. 나는 곧 모든 차이가 잊혀지고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분별이 없는 깊고 깊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수고도 없고 형상도 없는 무인지경의 적막한 선성에 든다.
문서 사자실이 추워 손이 곱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스타트 로사 프리스티나 노미네, 노미나 누다 테네무스.>
--- p.775-776
그분은 당신의 지식을 쓰시되, 하느님 백성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쓰셨다. 따라서 그 분은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은 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베노는 제 삶을 가꾸는 수단으로서, 제 비천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 다른 인간을 믿음의 전사나 이단의 첨병을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지식을 구한다. 이것이 탐욕이다.
--- p.735
그런데 서글펐다. 수많은 사물을 통하여 보고 누렸다고는 하나 허상일 뿐. 역시 내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 모순을 풀어서 설명할 수 없었다. 인간의 정신로 나약한 것이다. 세상은, 완벽한 삼단 논법의 세계를 세운 신성한 이란 참으이성의 도정이지만 인간의 정신에는 그 논법에서 이탈하여 저에게 유리한 명제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악마의 농간에 넘어가는 것일 터이다.
하면, 그날 아침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어 놓던 그 여자에 대한 상념 역시 악마의 농간이었더라는 말인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신분이 수련사였다는 데 있다. 내가 수련사만 아니었다면, 인간의 마음에서 인 그런 격정 자체는 크게 허물될 바 아닐 것이다. 남자의 마음에 여자에 대한 그러한 격정이 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그래야 이방의 사도들이 바라듯이 육과 육이 만나 새로운 인간이 지어지면서 선거하는 세대가 있고 후래하는 세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방의 사도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보아준 것은 우리 같이, 동정 지키기를 서운한 사람이 아닌 속인들게 한하기는 한다.
--- p.516
"우리가 불지르고 노략한 것은, 일찍이 청빈을 우주적 율법으로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타인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쌓은 부를 전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교구에서 저 교구까지 뻗어 있는 탐욕의 거미줄 한 가운데를 걷어 버리고 싶었을 뿐이지, 얻기 위해 노략하고 노략하기 위해 불지른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징벌하기 위해, 더러운 자들을 피로 정화하기 위해 죽였습니다. 어쩌면 정의를 향한 미치광이 같은 욕망에 쫓긴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인 한, 하느님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나 지나친 무류에 겨워 죄를 짓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내셨고, 마지막 날 영광의 승리자로 선택하신, 참 영혼을 가진 대중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의 파멸을 앞당기고, 천국에서 그 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우리만이 그리스도의 사도였을 뿐, 다른 이는 모두 그분을 배반한 이단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게라르도 세가렐리는 신목(神木), <믿음의 뿌리에서 싹튼 신의 식물>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은 하나님께서 목소 세우신 교단입니다. 우리는 하루 빨리 당신네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무고한 자도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 모두에게 두루 미치는, 보다 나은 새 세상을 바랐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의 탐욕이 불러 일으킨 전쟁을 줄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당신네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정의와 행복이 뿌리내리려면 우리 모두가 피를 흘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은 … 사실은 그런데도 최후의 날은 앞당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타벨로에서 카르나스코 강물을 핏빛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피도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 피와 당신네들의 피가 …돌치노의 예언이 실현될 날이 가까워진 듯해서 우리로서는 그 징조가 보이는 날을 앞당겨야 했던 것이지요."
레미지오는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을 법의 자락에다 비볐다. 머리로 상상했던 피를 실제로 닦고 있는 것이었다.
"저 돼지가 이제 정결함을 다시 얻었다."
사부님이 속삭였다.
"이게 정결함입니까?"
--- pp.713-714
"우리가 불지르고 노략한 것은, 일찍이 청빈을 우주적 율법으로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타인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쌓은 부를 전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교구에서 저 교구까지 뻗어 있는 탐욕의 거미줄 한 가운데를 걷어 버리고 싶었을 뿐이지, 얻기 위해 노략하고 노략하기 위해 불지른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징벌하기 위해, 더러운 자들을 피로 정화하기 위해 죽였습니다. 어쩌면 정의를 향한 미치광이 같은 욕망에 쫓긴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인 한, 하느님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나 지나친 무류에 겨워 죄를 짓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내셨고, 마지막 날 영광의 승리자로 선택하신, 참 영혼을 가진 대중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의 파멸을 앞당기고, 천국에서 그 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우리만이 그리스도의 사도였을 뿐, 다른 이는 모두 그분을 배반한 이단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게라르도 세가렐리는 신목(神木), <믿음의 뿌리에서 싹튼 신의 식물>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은 하나님께서 목소 세우신 교단입니다. 우리는 하루 빨리 당신네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무고한 자도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 모두에게 두루 미치는, 보다 나은 새 세상을 바랐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의 탐욕이 불러 일으킨 전쟁을 줄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당신네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정의와 행복이 뿌리내리려면 우리 모두가 피를 흘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은 … 사실은 그런데도 최후의 날은 앞당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타벨로에서 카르나스코 강물을 핏빛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피도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 피와 당신네들의 피가 …돌치노의 예언이 실현될 날이 가까워진 듯해서 우리로서는 그 징조가 보이는 날을 앞당겨야 했던 것이지요."
레미지오는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을 법의 자락에다 비볐다. 머리로 상상했던 피를 실제로 닦고 있는 것이었다.
"저 돼지가 이제 정결함을 다시 얻었다."
사부님이 속삭였다.
"이게 정결함입니까?"
--- pp.713-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