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가까운 영국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이탈리아를 거쳐, 철학과 미학을 탐색하기에 알맞은 아테네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을 지중해 미지의 섬에서 마무리한다. 나의 기행은 이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었고, 이 책의 구성에도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렇다 보니,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거의 모든 희곡을 조망하는 전망대의 꼴을 갖추게 되었다.
---「프롤로그」중에서
셰익스피어의 생가가 있는 헨리 가로 꺾이는 길목에 그의 탄생 450주년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 길을 몇 차례 오가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붉은 바탕에 흰 글씨인 데다 2층 높이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자들마저 소문자였다. 솜씨로 보아 그곳 주민들이 만든 듯했지만, 그래도 ‘450년 젊은 셰익스피어’라는 그 짧은 구절은 셰월이 흐를수록 젊어지는 셰익스피어의 역설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었다.
---「1장 영국, 소란스러운 나라의 영광스러운 이야기」중에서
스트랫퍼드와 런던 사이의 거리는 공간적 개념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것은 ‘윌리엄’과 ‘셰익스피어’ 사이의 거리, 스트랫퍼드가 빚어낸 청년과 세계적인 극작가 사이의 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미지의 8년간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든,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벼러내려는 의지가 들끓었던 용광로 같은 것이었으리라.
---「1장 영국, 소란스러운 나라의 영광스러운 이야기」중에서
“그는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를 세계 최고의 작가로 올려놓은 최초의 찬사이다. 그 시대의 모든 작품 목록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6분의 1에 지나지 않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거의 다 살아남았다. 그럴 만큼 그는 당대에 이미 최고의 작가로 대접받았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상업적 압박이 오히려 그의 재능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1장 영국, 소란스러운 나라의 영광스러운 이야기」중에서
덴마크의 실제 역사에서 햄릿에 해당하는 인물 암렛은 복수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되기까지 미친 척하며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보낸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그 긴 세월을 삭제해버렸다. 그는 피살과 복수 사이의 공백을 풍부한 시적 언어를 펼치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성찰하는 데 활용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햄릿의 고뇌 어린 내면 풍경을 심어두었다. 그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뿌리 깊은 의문이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이다.” 이 의문은 유령이나 복수와는 거리가 멀다.
---「2장 파리에서 빈까지, 영원과 사랑을 향한 발걸음」중에서
괴테는 셰익스피어의 시적 상상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이러한 찬사가 연극 공연 쪽으로 옮아가면 환멸이 된다. 괴테가 생각하는 연극은 무엇보다 보이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잘 짜인 구성이다. 소설에서는 느슨한 구성이나, 여기저기로 건너뛰면서 장소, 시간, 인물, 사건들을 중첩시키는 것도 허용된다. 이와는 달리, 연극은 더 좁은 단위로 이루어진 집중적인 관계를 일관성 있게 끝까지 끌고가기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장르적 요청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맥락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소한 것들을 통해 작품 속에 일상적 삶의 실감이나 이질성을 끌어들였고, 거기에는 대중의 흥밋거리 또는 일상의 세목도 포함되어 있다.
---「2장 파리에서 빈까지, 영원과 사랑을 향한 발걸음」중에서
이 연극의 첫머리에서 코러스가 “이들의 죽음이 부모들의 갈등을 덮어버린다고”고 예고했듯이, 마지막 장면에서 두 가문은 화해에 이른다. 이런 결말이 이 작품을 비극으로 규정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탁월하고 통탄할 만한 비극’이다. 가문의 화해와는 무관하게 주인공들의 죽음이 이 연극을 비극으로 규정하게 만든 것이다.
---「3장, 지중해, 끝없는 이야기의 바다」중에서
이아고의 거짓말에 속은 오셀로는 사랑하는 데스데모나를 죽인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는 질투가 풀릴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거부한다. 오셀로는 이아고의 거짓말을 쏙쏙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보이고, 거짓말을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이아고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보인다. 이런 관계가 가능해진 것은 작가가 질투의 비극을 강렬하게 표현하려고 이 두 사람에게서 어떤 인격적 요소들을 삭제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오셀로에게서는 해석의 능력을, 이아고에게서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윤리 의식을.
---「3장, 지중해, 끝없는 이야기의 바다」중에서
비행기는 잔잔한 바다 위를 꿈결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바다 어딘가에 상상의 섬 하나를 마련하고, 이 섬을 무대 삼아 유토피아적 판타지, 신세계에 대한 식민적 지배 방식, 그리고 인간의 권력의지를 시험하였다. 그리고 복수의 미학과 구세계로의 귀환이라는 또 다른 주제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어떠한 문학적 원본도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그의 마지막 작품 『폭풍』이다.
---「3장, 지중해, 끝없는 이야기의 바다」중에서
셰익스피어가 빚어낸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상호작용은 세계문학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진폭이 크다. 그래서 그의 작품세계는 당시 대중의 환호와 지금 비평가의 탄성이 동시에 터져나오는 시공간이 된다! 이것은 결코 나 하나만의 상상이 아니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