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리터 카 컨셉은 최초의 3리터 카가 형체를 막 갖추기 시작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65번째 생일 전에는 주행이 가능한 1리터 카 프로토 타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점차 구체화해 갔다. 회장으로 근무하는 마지막 날에 타고 나갈 차로 1리터 카보다 더 적합한 것이 과연 있을까?
-- 본문 중에서
아우디는 1990년까지 종업원 약 4천 명을 해고했다. 당시의 경기나 매출액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진 인력 감축은 세계 경쟁 업체들의 다운사이징 추세에 발맞추어 나가기 위한 구조 조정이었다. 뮌헨 신공항 건설로 노동 시장의 상황은 다소 나아졌지만, 당시만 생각하면 아직도 내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가족이 집무실 앞에서 울던 모습을 나는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당시 대대적인 인력 감축이 불가피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만 유동적인 고용 정책 모델이 정착되기 전이었던 만큼 충격이 더 컸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전임자들처럼 온건 노선을 걸었더라면, 이보다 훨씬 심각한 파장을 몰고 올 대규모 인력 감축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1950년대 초는 교육의 암흑기라고 흔히 말한다. 실제로 그 스위스 기숙사 학교는 학생들의 여가 시간을 감시할 목적으로 일종의 정보 수집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학교 근처의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술집마다 전교생의 사진이 담긴 앨범이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술집 주인들은 앨범의 사진과 대조해 보고 각 학생의 술값을 기록해 두었다가 학교에 알렸다(술집 주인들이 왜 그런 일에 협조했는지 아직도 이해는 가지 않는다). 술집의 연락을 받은 학교는 학생들이 집에서 공식적으로 받는 용돈과 술값을 비교해 보았다. 물론 이런 일은 학생들 모르게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기차역에서도 이런 활동이 이뤄졌다. 하루는 여자 친구를 만나러 기차역에 갔다가 하마터면 발각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갈 때면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보도록 만전을 기하기 위해 렌즈를 끼고 도수가 높은 근시 안경을 끼고 다니기도 했다. 취침 시간 전까지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으면 바로 퇴학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고 다녔다. 한번은 아침식사 당번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외박을 하고 들어오는 바람에 발각될 뻔한 적도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역사학자 한스 몸젠(Hans Mommsen)은 이에 대해 간략하고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나치 정권 시대에 정치권 엘리트만큼 특수한 지위를 누렸던 인물이다.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일정 부분 기여했고 또한 자신이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엔지니어이자 설계자로 우뚝 서는 데 발판이 되어준 나치 정권의 범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는 역사에 맡기도록 하자. 폴크스바겐 공장을 위해서라면 독재자 히틀러도 서슴지 않고 만났던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오직 기술만 알았던 사람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