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지 전도는 씨를 뿌리는 것이다. 넛저들은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 영혼에 양분을 공급한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우리는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 결과는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넛지는 하나님이 직접 이끌어 가시는, 확장 가능한 기업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과 시간과 환경을 사용하셔서 성장시키실 것이다. 우리의 지속적인 참여를 요구하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넛저들이 결과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넛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통로로서 관대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아낌없이 투자를 한다.
복음이란 길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예수님이 길이시며, 기만이 왕인 거짓의 문화 속에서 예수님이 진리이시며, 사망의 복음 전도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예수님이 생명이시라는 좋은 소식이다. 《넛지 전도》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전도하고 사망에 맞서라는 부르심이다.
넛지 전도의 5가지 기본 토대
이제는 이런 접근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때다. 넛지는 5가지 약속을 기반으로 한다.
첫째, 눈에 띄는 모든 사람, 스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당신 안에 계신 예수님의 관심 대상이다.
둘째, 모든 잡목은 떨기나무다.
셋째, 모든 최선은 축복이다.
넷째, 모든 최악은 은혜를 위한 때이다.
다섯째, 모든 사람에겐 넛지가 필요하다.
무슨 뜻인가?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둘째, 하나님은 이미 불타는 떨기나무의 형태로 그 사람의 삶에 존재하신다.
셋째, 그 사람에 관한 가장 좋은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이다.
넷째, 그 사람에 관한 가장 나쁜 것들은 하나님의 구속이 필요한 부분이다.
다섯째, 사람들은 격려와 사랑에 굶주려 있으며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넛지 전도의 3가지 공식
믿음의 코치들과 영적인 관리자들은 하나님의 최우수 넛지 전도 팀이다. 그들은 평생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정성을 들이며 교묘하게 넛지한다. 이 지혜롭고 사랑 많은 멘토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에게 보여 주라. 그들이 보지 못하면
그들 앞에서 직접 행하라.
말하고 보여 주고 행하기 위해 넛저들은 점점 더 창의성을 갖춰야 한다. 그들이 발전할수록 이 넛지의 형태들이 더 친밀해지고 다정해진다.
넛지 전도 공식은 단순하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고, 빠르게 규모를 확대하며, 예수님처럼 살라! 넛지는 예수님이 부활 후에 처음 말씀하신 명령에 요약되어 있다. “빨리 가서 이르되…”(마 28:7). ‘간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 하찮은 일이라도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빨리’ 가라는 것은 가속도를 이용해서 “빠르게 확장하라”는 것이다. ‘이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며, 우리 조상들처럼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간증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
가장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그를 만날 것을 기대하라. 행복보다 깨어짐 속에서, 부유함보다 가난함 속에서, 건강한 사람들보다 아픈 사람들 속에서 그를 볼 것이다. 그가 정말로 예수님이라면, 곧바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낯설고, 이상하고, 생소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래서 처음엔 무서울 수도 있다.
하나님은 깜짝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고난의 하나님이시다. 첫째, 깜짝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교회에 올 때 뜻밖의 일을 겪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가장 많이 기대하고 와야 한다.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가 미래에 대해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을수록 그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이 낮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곳,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우리에게 설명서나 청사진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자라는(또는 자랄 가능성이 큰)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시는데, 그곳은 종종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확실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도하신다.
영화 섀도우랜드에서는 C.S. 루이스의 이런 말이 인용되기도 했다.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다.” 부활하신 주님은 책 속에서 찾으면 안 된다. 책은 주님의 수의요, 덮개이며, 북극성과 남십자성을 가리키는 주님의 나침반이다. 살펴보아야 할 곳은 사람들이 육신과 영의 상처로 아파하는 곳이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기 원했다면 주님이 보라고 하신 곳을 보아야 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능력으로 나중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교회 신학의 많은 부분이 심판의 개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심판의 요소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즉 하나님은 유죄 판결을 내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예수님 사역과 교회 사역의 대부분은 법정의 배경에서 행해지지 않는다. 병원 같은 환경에서 행해지며, 건강과 치유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법정에서 병원으로 빨리 옮길수록 그리스도와 교회의 치유와 회복 사역에 더 빨리 가담할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그는 상처 입고 굶주린 모습이었다. 우리는 잘못된 곳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모습을 놓치고 만다. 권력과 부의 중심지는 우리 사회의 주변부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주변부에서 가장 독창적인 성령의 역사들이 탄생하고 온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준다.
랍비 조슈아 벤 콰레하(Joshua ben Qarehah)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것 중에 하나님은 초라한 떨기나무를 택하셔서 거기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을까요?” 온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것, 심지어 떨기나무 속에도 계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과 개인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때 성경은 떨기나무가 불탄다고 말한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 25:37-39).
“이곳이 그곳인 줄”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 나라의 품질 보증 마크라도 있는 것인가? 가난한 자, 불구인 자,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 있는가? 교만한 자들이 겸손해지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소중히 여김을 받는 곳이 어디인가?
신을 벗고 떨기나무 앞에 서라
하지만 무엇보다 명심할 것이 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제일 처음 들은 말이 무엇인지 기억나는가? 신을 벗으라는 것이었다. 이 본문의 오래된 해석들에 의하면, 그가 단지 거룩한 땅에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땅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다.
우리의 문제는 자신을 보호하고 감싸려는 습관과 관습들(그 한 예가 신발이다) 때문에, 거룩한 존재, 즉 이미 그곳에 계신 하나님를 경험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