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보낸 꽤 오랜 시간 동안 유물을 보고 진정으로 절절함을 느끼지 못했으니, 그곳은 그저 하나의 사무실에 불과했다. 답답하고 힘든 시기였다. 그러다가 공부가 진척되고 견문이 쌓여 가면서 참으로 긴 시간이 흐른 어느 때부터인가 남의 지식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하나하나 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안목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안목이란 단순히 유물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물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포괄한다. 이러한 점에서 돌아보건대 내가 안목을 틔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러한 눈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중에서
미호박물관은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아니다. 더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오늘날의 박물관 현실에서, 가기 어려운 그 깊은 산중에 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의 뜻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박물관에 오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고사 속 어부가 좁은 입구를 통해 어렵사리 도화원에 다다랐듯이, 미호박물관을 찾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낙원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속에 꼭꼭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박물관, 겨울철이면 아예 휴관해 버리는 박물관. 미호박물관은 확실히 오만한 박물관이다.
몇 년 후 미호박물관을 다시 찾았다. 마침 설립자의 기념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설립자가 추구했던 정신을 짧은 글로 적어 놓았다.
“훌륭한 것들을 많이 보아라! 이류나 삼류가 아닌 최고의 것들을 보게 되면, 당신은 점차 훌륭한 것에 눈이 뜨일 것이다.” ---「오만한 박물관」중에서
항상 유쾌한 아소 주인아주머니는 평소 ‘논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래서 그런지 꽃을 가지고 스스로 즐길 뿐 별다른 욕심이 없어 보인다. 아마도 이 세상을 떠날 때쯤이면, “한세상 잘 놀고 갑니다.”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공자가 말한 유어예(游於藝)의 실천이다. 한 평범한 주부로서 이렇게 뛰어난 안목에 이르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아주머니는 젊은 시절에 최고 수준의 것을 보고, 맛보고, 경험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안목이 트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풀꽃 갤러리 아소」중에서
도록 작업이 진행되면서 준초이, 이용현 두 분 모두 백제 유물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바로 간취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학술적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동물적 감각을 지닌 분들이어서, 나로서도 많은 배움을 받았다. 일부 완성된 사진 작품을 보면서 모두들 뭔가 대단한 결과를 예상하고 약간은 흥분된 분위기였다.
한번은 휴일 낮에 헤이리 한길사 북카페에서 네 사람이 모여 도록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간이 길어져 저녁을 먹고, 또 카페가 문을 닫자 어두운 밖에 나와 길에 서서 얘기한다는 게 자정이 가까웠다. 나중에는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어넘치는 열정의 시간이었다. ---「알아본다는 것」중에서
지방 박물관은 예산이나 전문 인력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전시를 기획할 때 저비용 고효율의 주제를 발굴하는 것이 유리하다. 전투로 말하면 대형 박물관은 전면전을 택하고, 소형 박물관은 게릴라전을 펼치는 편이 바람직한 격이다. 그런 성격을 고려해서 청주박물관에 있을 때 관조 스님의 사찰 꽃살문 사진전을 기획했다. 대중적이고 전달력 있는 전시라서 반응이 좋았다. 다른 여러 박물관에서 요청을 받아 전국 열 군데가 넘는 곳을 순회 전시했다. 새로이 제작한 도록도 찾는 이들이 많아 여러 쇄를 거듭 찍었다.
스님의 작품집 가운데 예술성과 불교적 정신성의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은 『생, 멸 그리고 윤회』와 『한줄기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수행과 사진 예술이 결합되어 만들어 낸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이듯이, 스님에게 사진은 여기(餘技)가 아니라 수행 그 자체였다. ---「관조 스님 행장」중에서
어릴 적에 갔던 시골 마을은 켜켜이 세월의 때가 묻어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진한 색이었다. 정돈된 밭이랑과 논, 논밭에 자라는 농작물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잘 가꾼 정원과 다를 바 없었다.
어린 시절 초여름 날에 할머니는 집 뒷동산 꼭대기의 콩밭을 매곤 했다. 학교가 파하면 나는 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매번 산 밑 옹달샘의 물을 주전자에 떠서 할머니에게 갖다드렸다. 물이 차가워서 표면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힌 주전자를 들고 낑낑대며 산 위에 오르면, 그늘도 없는 초여름의 뙤약볕에서 수건 쓴 할머니는 혼자서 밭을 매고 있었다. 내가 멀리서 ‘할머니’ 하고 부르면서 다가가면, 치마까지 땀에 젖은 할머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하며 주전자 뚜껑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에게 콩밭 매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요, 고독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 잡초가 제거되어 말끔히 정돈된 콩밭은 할머니에게 예술 작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너진 마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