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란 사실보다도, 재연될 수 없는 시간이란 사실이 그리움의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추억이란 그 시절에 두고 온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띄워놓은 부표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가슴 뛸 일이라곤 협심증밖에 남지 않은, 지나간 시절의 소년들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어느 4월의 화양연화. 봄바람으로 흩어지던 꽃잎들에 새겨놓은 청춘의 기억, 초속 5cm로 멀어지고 있는 그 부표에 새겨놓았던 청춘의 이름, 사쿠라기 하나미치櫻木花道(강백호 일본이름)
---「초속 5cm」중에서
나를 비껴간 우연은 실망에 그치지만, 필연이라 믿었던 것들이 비껴갈 시에는 절망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차라리 우연이란 놈은 비껴갔다는 사실조차도 뒤늦게 발견이 되는, 그제서야 뒤돌아보는 아쉬움 이상은 아닌 경우도 많다. 하지만 필연의 해석은 다시 기대하게 하고, 돌아보게 하며, 다시 상처받는 순환을 반복하게 한다. 강백호에게 채소연은 그런 순환의 ‘증상’이었다. 채소연은 이미 농구부 서태웅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결정적 순간」중에서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위대한 사건이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무언가를 가능케 하는 미래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케 하고자 시작했던 일이, 결국엔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로 변해버리는 강백호의 미래처럼….
---「존재와 사건」중에서
지금쯤 강백호는 몇 살일까? 언제 펼쳐도 17살의 1학년 1학기를 살아가고 있는 강백호, 그리고 강백호 곁에 두고 온 우리들의 17살. 그 17살로부터 숱한 날들과 작별하며 이토록 멀어져 온 지금, 우리는 몇 살인가? 강백호가 발견한 어느 날이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잊혀졌을지도, 혹은 아예 없었을지도…. 발견 이후에도 강백호처럼 다 걸어보지 못했던 결과가 지금의 자신이지는 않은가?
---「꿈, 너 스스로의 계시」중에서
내 학창시절에는 농구 골대의 그물이 항상 찢어져 있었다. 학교에서 새것을 달아줘도, 일주일을 못 버텨냈던 것 같다. 농구가 열풍이었던 시절이라, 쉬는 시간마다 쏟아져 나와 공을 던지는 학생들의 열정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내구성일뿐더러, 새로 그물이 달리는 날엔 더 극성인 열정들이었다. 교사로서의 시간까지 덧대어 돌아보는 추억이지만, 내게 학교는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기억은 아니다. 그나마 아름답게 기억하는 풍경 중 하나가 그 찢어진 그물이다.
---「찢어진 그물」중에서
그 사람을 못 잊어서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었다. 실상 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행복해지지 못할까봐 두려웠던, 불안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 사람보다 먼저 행복해지고자, 사랑의 아픔은 다른 사랑으로 잊어가는 것이라는 통설에 굴복하면서, 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연민.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마음이었다. 소설처럼 사랑하고 싶었는데, 영화처럼 살고 싶었는데, 틀리지 않는 슬픈 예감의 반전은 내가 로미오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거짓말을 두고 돌아오긴 했지만」중에서
정대만이 농구부에 돌아올 수 없었던 원인 역시 ‘질투’의 감정 때문이었다.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자존심이 더욱더 자신을 농구로부터 밀쳐내고 있었던 것. 송태섭을 향한 집착은 정대만의 패밀리들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들도 정대만이 농구부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남자에게 있어 최소한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존심, 정대만에게 있어 그 자존심이 농구에 관한 과거였다. 남들이 건드릴 수 없게, 아예 가슴 깊숙한 곳에 숨기고 살았던…. 그러나 그 열망만큼으로 안을 파고드는 골 깊은 상처이기도 했다. 이런 상처를 건드린 것은 최측근인 영걸이었다.
---「선망과 질투 사이」중에서
내 또래들의 학창시절엔 그야말로 농구 열풍이었다. 체육 선생님이 공만 던져주면 알아서 놀았던 시절의 교육과정에선, 농구 골대를 차지하지 못한 녀석들이 축구를 했을 정도이다. 전교 1등과 전교 꼴찌가 따가운 햇살 아래 미끄덩거리는 살을 맞대고 어울리던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이키는 에어조던 시리즈 하나로 아디다스와 리복을 저만치 따돌리고 앞서가고 있었다. 뻔히 가지 못할 대학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연고전에는 어찌나 환호를 쏟아냈던지…. 매주 화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주간만화잡지의 발행일에는, 반의 모든 아이들이 야자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이면 열혈 독자였던 친구 한 놈이 석식 시간을 이용해, 학교 근처의 서점에서 이번 주의 이야기를 사 들고 왔기 때문이다.
---「그때와 같을 순 없으리오」중에서
『슬램덩크』에서 농구가 아닌 것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관계들이 있다. 농구 이전의 인연으로 다가와 있던 사람들, 바로 강백호와 정대만의 친구들이다. 지나간 세대에게 매주 행복의 시간을 제공했던 신화창조의 연대기, 그 마지막 한 땀은 농구와 전혀 관련이 없었던 ‘친구’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아름다운 서브」중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캐릭터들이 어느 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자신의 완력으로는 끌어올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전체의 얼개를 미리 기획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스토리 속의 우연과 필연을 따라간 캐릭터들 각자의 서사였다고…. 특히나 윤대협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조차 그 녀석을 이해하기가 힘들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서글서글해 보이는 선한 인상이 도리어 전혀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포커페이스로서의 기능성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서태웅에게로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마성의 매력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의 에이스」중에서
드디어 공개된 이정환의 얼굴. 아직은 강백호로부터 ‘애늙은이’의 별명을 부여받지 않은 시기, 경기장에서 한창 반칙을 저지르고 있던 강백호에게는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다가오게 될 미래였지만, 독자들에게는 벌써부터 확인되고 있던 노안老顔의 아우라였다.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다가선 다스베이더의 포스라고나 할까? 말풍선의 대사를 지우면, 윤대협에게 I’m your father를 고백하고 있는 듯했던 카리스마 넘치는 노안.
---「1인자의 카리스마」중에서
스토리 내에서 통용되는 시선과 독자의 시선이 일치하는 선수가 있다. 바로 상양의 김수겸이 그 주인공이다. 남자들의 격렬한 세계와는 조금 동떨어진, 마치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외모는 굳이 차별화 전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딱 봐도 그냥 대번에 알 수 있다. 이 캐릭터는 미소년이란 사실을….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너무 꽃미남 캐릭터를 의식했던 탓인지, 간간히 채소연과 헤어스타일 하나로 변별이 되는 장면도 있고, 서로 다른 좌표 선상에 있는 서태웅의 수려함이 상양과의 대결에서는 순정만화 스타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 자신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작가 특유의 유머 코드에서 유일하게 비껴간 미학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미학의 완성은 얼굴」중에서
그런 게 또 삶이라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진리를 인정하며 아름다운 한 조각의 추억으로 돌아보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황태산만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잔인한 운명은 아니었다. 저마다의 열정과 최선이었음에도 북산에 좌절을 맛봐야 했던 모든 팀에게도 또한 그런 게 삶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약체라고 무시했던 설움을 딛고서 이루어낸 감동을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던 북산에조차도, 또한 그런 게 삶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조우」중에서
비록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더라도, 좋아했던 일에 쏟아부은 열정과 노력의 시간을 담아 쏘아 올린 농구공. 그것만으로도 권준호에게 슛을 쏠 자격은 충분했다.
---「최선을 산다」중에서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렇듯 내가 지닌 모든 걸 불사르는 열정이다. 승패는 차후의 문제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최선이었다는’ 후회가 아닌, ‘지금 생각해도 최선이었다는’ 만족을 기억으로 남기려는, 몰아적 집중을 가능케 하는 행위이다. 이 상황이 다시 반복된다 해도 이 이상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 결과에도, 그 이상을 해내지 못했다는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채치수에겐 그런 열정이 구현된 행위가 바로 농구이다. “농구… 좋아하세요?” 강백호에게 던졌던 채소연의 질문에 대한 궁극의 대답은, 자신의 오빠인 채치수였는지도 모르겠다.
---「고릴라의 꿈」중에서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거머쥐어야 할 하나의 가능성이, 내가 가장 원하고 바라는 소망이라면, 그 이후에 펼쳐질 다른 가능성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숱한 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 기회가 다시 다가온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다음이란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운명의 순간이 어떤 미래에 닿아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미래에서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 가져다주는 후회가 더 클까? 니체의 ‘영원회귀’는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운명의 순간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 해도, 번복하지 않을 수 있는 가치, 그것을 택하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된다 해도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겠는가? 채치수와 강백호의 대답은 Yes였다.
---「나는 지금입니다」중에서